<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킹메이커> 등 브로맨스의 질주를 촉발시키는 데 탁월한 변성현 감독의 능력은 자기극(磁氣極) 강한 캐릭터 구축에서 비롯한다. <길복순>에서도 이는 적중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 킬러이자 싱글맘인 길복순(전도연) 또한 대중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력하다.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대하고 화초도 무성하게 키워내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자비란 없다.
- 배우 전도연에게 가장 가지 않을 장르가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액션을 떠올렸다고. <길복순>은 처음부터 전도연 맞춤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나.
=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전도연 배우와 작품을 함께하기로 했다. 나에게도 전도연 배우에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사이에 액션이란 장르와 킬러라는 소재를 떠올렸다. 전화로 말씀 드렸더니 “어머 액션은 자신 없는데~” 하시더라. (웃음) 전도연 배우는 워낙 본인과 승부를 하는 분이라 바로 혹독한 트레이닝에 임했다.
- 숙련된 살인 기술을 갖췄지만 딸을 보면 죄의식을 느끼는 엄마, 규칙에 집착하는 범죄자, 신실하지만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아버지를 살릴 병원비를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남자. <길복순>에선 모순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 일상에서 작은 모순들을 쉽게 볼 수 있지 않나. <길복순>은 그런 부분을 극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보통 킬러 영화엔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희생하는 부모가 나오는데 <길복순>엔 일부러 그런 클리셰를 넣지 않았다. 오히려 딸을 위해서라면 정황상 싸우러 가지 않는 게 맞는데, 이기적일지언정 복순은 자신을 위해 복수를 실행한다. 딸 재영(김시아)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며 “나한테 떳떳하고 싶다”고 말할 때, 은연중 영향을 받은 거다. 자신이 킬러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으면서도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건 재영이 엄마에게 전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또 절대 신을 믿지 않는다던 복순이 하느님을 부르짖는 것도 모순을 잘 보여준 장면이다.
- 차민규(설경구)는 “무직자들은 절대 지킬 수 없는 규칙”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심지어 세 가지 규칙 중 두 가지는 회사의 허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또 사람들은 청부살인 대기업 ‘MK ENT.’에 들어가고자 혈투를 벌이기도 한다. <길복순>에서 소속감이나 명성 있는 대기업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
= 그냥 킬러 이야기가 아니라 킬러들의 사회생활을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직원(킬러)마다 고과에 따라 A급, B급으로 나누기도 하고 잘 죽이는 킬러는 후배들의 동경을 받는다. 젊은 킬러들은 일부러 홍대 근처의 회사를 다닐 법한 직장인 스타일로 꾸몄다. 희성(구교환)의 경우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혀서 규범 속에 있지만 혁명을 바라는 은밀한 성향을 드러냈고, 복순을 배신할 때는 일부러 와이셔츠를 입게 했다. 직장인으로서의 킬러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수근(김기천)도 퇴직 이후 자영업을 하지만 생각만큼 잘 안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를 보여준다.
- 길복순은 한 시대를 풍미한 킬러다. 그가 지닌 기술 중 하나가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리는 것일까.
= 즉각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를 떠올리는 게 길복순이 가진 장점이긴 하다. 하지만 그 장면을 넣은 가장 큰 이유는 살인과 양육의 고충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살인은 단순하게 처리된다. 여러 가능성 중 가장 현실적이고 간편한 것을 골라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에 관해선 어떤 수싸움을 해도 마음대로 안된다. 딸의 담배를 발견한 복순이 각기 다른 대처를 상상해보지만 그 결과는 모두 같지 않나. (웃음) 그런 내적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 술집에서 벌어진 단체 육탄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하나의 벽을 두고 서로 다른 두 경우를 보여줘야 했는데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신체적으로나 도구적으로나 신경 쓸 게 많았을 것 같다.
= 영화에서 먼치킨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무명의 다수와 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길복순>은 그것과 달라 보이길 바라서 캐릭터 싸움으로 구성했다. 전도연 배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선보였다. 그래서 혹여나 서로를 다치게 할까봐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나도 괴로웠고. 하지만 장면이 예상대로 잘 나왔다. 벽 하나를 두고 두 집단이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는 건 한아름 미술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원래는 공간 확장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싸우려 했는데 벽 하나로도 그런 느낌을 충분히 줄 수 있어 신선했다.
- 재영을 연기한 김시아는 아직 미성년자라 청소년관람불가인 <길복순>을 못 본다. 퀴어의 로맨스 장면도 등장하는데 디렉션은 어떤 식으로 주려 했나.
= 키스신은 내가 직접 디렉팅을 주지 않았다.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일부러 전도연 배우에게 와주십사 부탁했고, 감사하게도 전도연 배우가 촬영에 필요한 디렉팅을 대신 해주었다. 덕분에 청소년 배우들을 배려하며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소라 역할을 맡은 임재인 배우의 어머니와 김시아 배우의 어머니가 고맙다고 하시더라. 그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