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홀>
빅브러더는 이미 현실에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알고리즘이 개인의 취향부터 소비까지 우리의 삶을 철저히 주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래빗홀>은 이러한 세태를 바탕으로 하여 모종의 음모론을 펼쳐낸 첩보 스릴러 시리즈다. 통칭 크라울리로 불리는 미지의 거물이 전 세계인의 개인정보 데이터를 이용하여 주가 조작이나 인구 통제, 나아가 미국의 대선에까지 손을 대려 한다. 주인공 존 위어가 이에 대응한다. 그는 사설 산업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정보 요원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오랜 시간 크라울리의 뒤를 쫓는 인물이다. 단 몇 개의 정보와 단서만으로도 사건을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셜록> 시리즈의 셜록 홈스를 방불케 한다. <24> 와 <지정생존자>의 주역 키퍼 서덜랜드가 주인공 존 위어를 연기한다.
<최애의 아이>
일본 현지에서 상당한 화젯거리가 된 TV애니메이션 시리즈다. 보통 TV애니메이션 한편은 30분 내외지만, 해당 작품의 1화는 무려 90여분의 편성 시간을 할당받았다. 시쳇말로 자본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고품질의 작화, 연출도 비범하다. 척 보기에도 특수한 화제작이라 할 법하다. 주제와 내용도 범상치 않다. 시골 의사 고로는 아이돌 호시노 아이의 광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호시노 아이가 고로의 병원을 찾아온다. 문제없이 출산일이 된 듯했지만, 출산 당일에 고로는 호시노 아이의 스토커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고로는 기억을 잃지 않은 채 호시노 아이의 쌍둥이 아들로 환생한다. 아이돌 소비문화의 명암을 대담하게 드러냈다는 평과 동시에 미성년자 임신과 살인 소재, 전생물 양식 등의 상투를 자극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스킵과 로퍼>
세계를 구하느라 다소 희미해졌던 스즈메의 청춘 로맨스가 아쉬웠다면 챙겨봐야 할 TV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주인공은 시골 마을에서 도쿄의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한 미츠미다. 입학생 중 수석일 만큼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다. 국가 요직의 관료가 된 후 어떻게 정년퇴직을 할지까지 구상해놓은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박적인 야심과 달리 실상은 허술하다. 늘 덤벙거리는 헛똑똑이인 데다 인간관계에도 무척 어리숙하다. 반면 같은 반 친구 소스케는 성격이 넉넉한 강아지상의 선인인 듯하나 맘속에 깊은 뒤틀림을 지닌 인물이다. 이러한 두 고교생의 대비 구도는 마치 안노 히데아키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을 순하고 부드럽게 옮긴 느낌이다. 청춘 로맨스의 껍질 밑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삶의 상흔을 진지하게 나눈다는 점도 유사하다.
<우리의 깃발은 곧 죽음>
바야흐로 18세기 초의 대항해 시대, 해적선 ‘복수호’의 선장 스티드 보넷은 벌레 하나 쉬이 못 잡는 여린 성정의 소유자다. 이런 기질 탓에 그는 아버지, 친구,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남자 구실 못한다며 무시당해왔다. 결국 보넷은 부유한 귀족의 삶을 포기하고 이른바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해적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억지로 변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선원들에게 노략질보단 바느질을 시키고, 취침 시간엔 유치원 선생님처럼 동화책 읽어주는 일에 여념이 없다. 결국 보넷은 전설적인 해적 검은 수염과의 만남을 통해 본성을 억제하지 않으면서도 성장하는 법을 깨우친다. 캐릭터 시트콤 형식 속에서 단 한 순간도 탁월한 유머의 결을 놓치지 않는 작품이다. <토르> 연작, <조조 래빗>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제작, 연출, 연기에까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