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종이달' 유종선 감독, 원작자 가쿠다 미쓰요, 돈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2023-04-27
글 : 김수영
사진 : 백종헌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종이달> 157쪽) 은행에서 일하는 리카는 우연한 일탈을 시작으로 범죄에 빠져든다. 평범한 주부를 사로잡은 만능감은 리카를 서서히 ‘사지보다 훨씬 비좁은 장소’로 몰아넣지만 그녀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까지 자신이 놓인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 2014년 국내 출간된 소설 <종이달>은 돈에 의한 삶의 주도권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오늘날까지 유효한 원작의 문제의식은 여러 창작자들을 매료시켰고 국내에서도 <종이달>을 원작으로 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가 제작됐다. 4월10일 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원작자 가쿠다 미쓰요와 드라마 <종이달>을 연출한 유종선 감독을 <씨네21>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가쿠다 미쓰요는 “OTT를 통해 지난해에만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130여편 봤다”며 한국 콘텐츠의 열렬한 팬이라고 밝혔다. <60일, 지정생존자> <어사와 조이> 등을 연출한 유종선 감독은 가쿠다 미쓰요의 글을 꾸준히 읽어왔다며 에세이집 <언제나 여행 중>을 꺼내 보였다. “여행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떤 분일까 기대하면서 왔다. 재치 넘치는 글을 쓰는 작가님인데 <종이달>같이 진지한 이야기를 오래 쓰는 동안 힘들지 않으셨을까” 하며 인사를 건넸다. 드라마를 아직 보지 못한 가쿠다 미쓰요는 유종선 감독의 이야기가 통역될 때마다 상기된 얼굴로 “정말 기대됩니다”, “멋져요” 하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 <종이달> 4부작 대본을 보고 연출을 결정했다고.

유종선 <종이달>이 품은 주제가 보편적이어서 끌렸다. 일본 문화권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한국 드라마에서 다루기 어려운 정서나 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종이달>의 이화(김서형)는 시청자에게 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자문하게 만든다. 시청자가 주인공을 응원하도록 만드는 드라마 작업을 주로 해왔는데 반대로 주인공에 관해 자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업이 될 것 같아 흥미로웠다.

- 작가님은 한국에서의 <종이달>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어땠나.

가쿠다 미쓰요 세계 최정상에 오른 기분이었다! (좌중 웃음) 한국 콘텐츠를 무척 좋아하는데 <종이달>을 드라마로 만들어준다니 떨리기도 했다. 티저 예고편을 짧게 봤는데 <마인>에 출연한 김서형 배우가 아름답더라. 그녀를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을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 원작 소설을 10부작 드라마로 리메이크했다. 연출자로서 어떤 이야기로 확장하고자 했나.

유종선 장편소설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기에는 10부작도 길지 않았다. 2016년 한국으로 배경을 바꾸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결이 달라졌을 뿐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진 건 없다. 소설이 90년대 일본의 젠더 의식을 다루고 있어서 그 부분을 어떻게 담아내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고민했다. 여성을 향한 억압적인 상황은 여전히 보편의 문제에 닿아 있어서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해 풀어나갔다. 여전히 고민되는 부분이긴 하다.

가쿠다 미쓰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과거 일본에서 여자는 현모양처여야 했다. 주부로 살며 집안일을 맡고 문제가 생겨도 참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컸다. 반면 요즘 젊은 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편이잖나. 한국의 젊은 세대가 <종이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원작자로서도 궁금하다.

- 원작에서 주인공은 고립돼 있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곁에 두 친구를 두어 다른 여성의 삶, 돈에 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유종선 원작 소설의 독특한 지점은 주인공 리카의 이야기가 친구인 유코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아키의 시점으로 끝난다는 거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주인공이 이야기된다는 점을 의미 있게 봤다. 세 인물 모두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데 ‘저들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거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돈 때문에 겪는 문제가 뭘까’ 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렸으면 싶었다.

가쿠다 미쓰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저 사람에게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어떤 기질이나 성격 등 저 사람만의 문제가 있었을 거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리카를 응원하던 친구나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각자 자기만의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난다. 자기 문제는 인정하지 않고 고립된 시선으로 남을 바라보는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다.

- 시청자가 응원할 수도 혹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주인공은 어떻게 보여주고자 했나.

유종선 배우를 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일본 드라마 속 주인공은 처연한 느낌이 들었고 동명영화의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 을 만큼 신비한 느낌이 좋았다. 반면 김서형은 표현력이 빼어난 배우다. 자신의 다른 정체성을 부캐처럼 연기하는 이화의 모습이나 그녀가 점점 변해가는 지점에 집중했다. 진짜와 가짜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종이달>의 테마가 드라마를 만드는 작업에 대한 은유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가쿠다 미쓰요 흥미로운 얘기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좌중 웃음)

유종선 이 이야기가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다른 버전 같다고도 느꼈다. 주인공은 자신이 믿는 사랑과 돈에 의해 계속 좌절을 겪는다. 자신의 한계를 깨지 못하는 여성, 억압적 상황에 놓인 여성의 이야기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풀 수도 있고 <종이달>처럼 풀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쿠다 미쓰요 드라마나 영화가 새로 나올 때, 제작자에 따라 캐릭터의 결이 달라지는 게 재미있고 매번 기대된다. 내가 원래 상상한 주인공 리카는 미인이지만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는 인물이다. 만약 같은 반 친구였다면 결코 친해지지 않았을 캐릭터다.

유종선 그 점은 같다. 나도 리카의 친구였다면 등짝을 때리면서 말렸을 거다. (웃음)

- 소설은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되는데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대학생 고타 시점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가쿠다 미쓰요 고타는 오직 리카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된다. 소설에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고타는 리카가 만들어낸 그림자 같은 캐릭터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리카와 고타는 서로 돈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유종선 두 사람은 서로의 범죄를 묵인하고 그 공감대로 관계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둘은 순수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측면도 있다. 이런 부조화 속에서 고통과 혼란을 겪는 일은 어찌보면 보편적일 수 있어서 그런 지점을 흥미롭게 풀어나갔다.

가쿠다 미쓰요 감독님이 <종이달>을 리메이크하면서 ‘이건 꼭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유종선 말씀하신 대로 주인공의 능동적인 순간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한국화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 각각의 문제를 가진 캐릭터 위주로 접근했다. 드라마에서는 고타, 즉 민재(이시우)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고타의 이야기가 원작 소설보다 구체화됐을 거다.

- 소설은 주인공의 불안을 치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소설 속 문장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데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

유종선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이화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고 일종의 사회적 가면이 달라진다. 그런 변화의 모습과 이야기 테마별로 스릴러, 로맨스 등 장르적인 톤이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벨바그영화에서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했다. <미치광이 삐에로>의 아나 카리나라든가 <일식>의 모니카 비티, <동경이야기>의 며느리 노리코(하라 세쓰코), <라쇼몽>의 마사코(교 마치코) 등 고전적인 레퍼런스를 찾았다. 평범한 여성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액션하는 방식을 유심히 봤다. 이화는 순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인물이라 이런 점도 잘 드러내고자 했다.

- <종이달> 출간 당시에는 실제 횡령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부각됐지만 이제는 소설 자체가 원전이 되고 상징적인 이야기로 자리매김했다.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이 실화 바탕의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제까지의 횡령사건을 살펴보면 남자들의 사주에 의해 여성이 수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게 왠지 억울하고 분하달까. 그래서 <종이달>에서는 코타가 돈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 없다. 리카가 사랑을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관한 반발과 소설 속 주체성이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유종선 드라마 <종이달>을 통해 작가님이 소설에 담은 주체성과 돈에 대한 테마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가쿠다 미쓰요 책을 봐주시면 좋겠지만 드라마만 봐주셔도 매우 감사하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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