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영화의 1부도, 2부도 마찬가지다. 배우 화령(조현진)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자신이 촬영한 영화에 관한 기억을 잃는다. 관계자들이 화령의 병문안을 와 영화에 관한 기억을 복기해 주지만 이들의 진술은 모두 다르다. 영화의 2부에 도달하면 영화의 우주는 몇 갈래로 나뉘어 더욱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81분의 러닝 타임 내내 흑백의 미로를 헤매야 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갈팡질팡한 미궁은 유형준 감독에 의해 쓰이고, 찍히고, 만들어졌다. 첫 장편 연출작 <우리와 상관없이>로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다녀온 후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유형준 감독을 만났다.
- 영화의 제목이 모호하다. 어떤 의미로 제목을 지었나.
= 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거나 큰 그림이 보이지 않을 때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을 제목화했다. 대개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강구할 때 여러 경우의 수를 연결시켜보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나. 나는 그런 방식이 문제 해결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연결하는 게 내겐 큰 상관이 없다.
- <우리와 상관없이>의 서사는 관람 중에도 후에도 플롯을 짜 맞추는 게 까다롭다. 선형적인 이야기 쓰기를 어렵다 밝히기도 했던데.
= 선형성도 결국 네트워킹의 한 방식 아닌가. 물론 영화는 네트워킹을 통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매체지만 나에겐 쉽지 않더라. 내가 추구하는 비선형성은 마음대로 네트워킹을 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 모든 캐릭터가 진술하는 영화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언뜻 혼란스러울 순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각자 기억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재구성하지 않나.
= 맞다. 그리고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도 모두 개별적이다. 나에게 중요한 일이 누군가에겐 별일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다르게 인식하는 세상을 향해 시선을 좀 더 들이대고 싶었다.
- 1부와 2부는 모두 흑백으로 찍혔고 긴 테이크로 이어 가는 장면이 많다.
= 1부를 찍을 땐 스태프가 없었다.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까지 혼자 도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색 보정까지 할 자신이 없어 흑백으로 찍었다. 9개월 후 2부를 찍을 땐 앵글 정도만 1부와 맞추는 방향으로 친구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2부는 컬러로 찍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와닿지 않아 1부와 똑같이 흑백영화로 만드는 것으로 귀결했다.
- 흑과 백, 명과 암, 낮과 밤, 생과 멸, 1부와 2부. 영화를 보고 남는 마음에 남는 단어 중 하나가 대비(Contrast)다.
= 대부분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시각적 정보가 안전하게 보이는 걸 선호한다. 그런데 나는 빛이 고루 묻어 있는 화면이 보기 싫다. 수려한 경치나 다수가 입을 모아 아름답다 이야기하는 것들에도 별 자극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순간엔 차라리 눈을 감거나 어두운 무언가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그런 여러 대비들이 영화에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 화령과 감독의 신랄한 대화는 언급한 대비들이 대사로 드러나는 예다. 화령은 영화는 살아있는 것이라 말하고 감독은 영화는 죽은 것이라 말한다. 이들의 논의 중 어디에 더 동조하나.
= 한쪽을 택하고 싶진 않다. 내게 영화는 아주 복잡한 기계장치다. 이 기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기계는 살아나기도 하고, 남들에게 살아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 복잡한 기계를 창작자든 수용자든 접하는 사람들이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 1부를 보면 화령과 PD(김미숙) 모두 감독(최성원)에게 토라져 있거나 역정을 낸다. 하지만 이들이 분노하는 내막은 영화에 묘사되지 않는다.
= 영화판에선 감독들이 항상 죄인이다. (웃음) 감독들이 죄가 많은 이유는 뒤집어 생각하면 현장의 많은 이들이 감독들에게 근거 없는 기대를 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도 직업 중 하나일 뿐인데. 감독에게 거는 온갖 기대들이 뒤섞인 곳이 영화판이다.
- 2부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야기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1부 내내 이야기되는 화령이 찍은 영화라 생각해도 내용이 어긋나고, 그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일까 짐작해봐도 논리가 단절돼 있다.
= 1부를 찍은 후 9개월의 휴지기가 있었다. 1부 이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여러 방향으로 고민했다. 아예 다른 리얼리티로 점프할까 아니면 1부 이야기 내부의 우주 혹은 외부의 우주로 빠져 나갈까. 그러다 문득 시험 문제의 답을 내려는 듯한 나의 태도가 싫어 모든 걸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1부에서도 상반된 이야기가 서로 엇갈린다면 아예 통합되지 않는 쪽으로 2부의 이야기를 몰고 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 전체 시나리오가 배우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1부를 쓰고 9개월의 공백이 있은 후 배우들이 2부의 대본을 받아봤다는 이야긴가.
= 시간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배우가 6명 정도 나오면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여러 연령대, 성별, 직업의 캐릭터를 무작정 만들었다. 그리고 배우 구인 웹사이트에 시나리오도 없이 캐릭터 정보만 나열한 구인 글을 올렸는데 너무 좋은 배우들이 구해졌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요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급히 1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일주일 정도에 써냈다. 그런데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으니 궁지에 몰리더라. 그래서 오래 쉬면서 2부를 썼다. 배우들도 그저 감독에게 사정이 있겠지 하며 기다려주었고 2부 시나리오가 나오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 비선형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배우들이 설명을 요구하진 않았나.
= 1부를 촬영할 땐 그런 일이 없었는데 2부를 촬영할 땐 배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목격하긴 했다. 언뜻 듣기론 당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개봉한 때여서 2부의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연기하면 되냐는 회의였던 것 같다.
- 이번 영화를 쓰고 찍을 때 시트콤과 축구 경기를 많이 챙겨봤다는 이야길 들었다.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던가.
= 영화는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근거 없이 무게를 잡기도, 쓸데없는 권위가 부여되기도 한다.하지만 나는 그런 무게가 영화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 진리나 구원을 영화만 다루어야 하나. 그런 무게에서 벗어날 때 영화도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내게 영화는 톱니 서너 개로 돌아가며 이따금 비싼 척을 하는 기계장치라면 시트콤이나 축구 경기는 톱니 천 개짜리의 훨씬 복잡한 기계장치다. 훨씬 더 많은 톱니들이 부딪치며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에 시트콤이나 축구 중계 보기를 즐긴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나 <제네럴 호스피털>, <사인펠드> 등을 즐겨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