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튤립 모양' 양윤모 감독, 섬세한 운동들이 만드는 스펙터클
2023-05-04
글 : 김수영
사진 : 최성열

일본에서 스쳐 지나간 남자를 찾아 무작정 공주에 온 유리코(유다인), 무성영화 속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와 똑 닮은 여자를 마주친 석영(김다현)은 운명처럼 만난다. 서로 자신이 기억하던 혹은 상상하던 그 사람이라고 느낀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진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옥과 봉분, 울창한 나무들은 흑백영화임에도 공주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1.37:1 프레임 속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배우들의 정갈한 연기와 연출은 만의 인상적인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감각과 이미지로 남는 의 제작 과정을 양윤모 감독에게 물었다.

- 공주의 자연 풍경이 아름답게 담겼다. 공주라는 장소에서 떠올린 이야기겠구나 싶더라.

= 일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공주를 들른 적이 있었다. 공주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여름, 가을, 초겨울 풍경을 접했다. 이곳을 배경으로 좋은 영화를 한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시작이었다. 공주의 자연을 배경으로 우화적인 기조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역사적인 유적지들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 <튤립 모양>이라는 제목처럼 화면 비율이 만들어내는 영화의 모양과 그 속의 조형적인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보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을까.

= 이미지나 특정 장소가 먼저 오고 그 뒤에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스토리부터 짜놓지 않고 눈빛, 표정, 제스처, 장소, 소품 이런 것들을 모으며 설계하는 과정이 먼저다. 시나리오로 써나가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설계 단계부터 화면 비율을 정했나.

= 프리프로덕션 초기에 확정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성영화의 화면비가 1.37:1이다 보니. 영화에서 보통 기억이나 꿈같은 장면들을 보여줄 때 화면 비율이나 컬러에 변화를 주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데 그런 방식을 지양하고 싶었다. 굳이 꿈과 현실, 영화 속 영화를 구분해 드러내고 싶지 않아 1.37:1의 화면 비율을 썼다. 기본적으로 프레임 안의 이미지를 구성할 때 4:3에서 3:2 정도의 네모 칸이 이미지를 구성할 때 이상적이라는 생각이다.

- 극 중 유리코는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을 연기한다. 유리코가 굳이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나.

= 국적이 다른 남녀가 조금씩 알아가는 알콩달콩한 연애영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두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인의 도움을 얻어 배우가 억양을 익혀나갔다. 억양을 어느 신에서 얼마나 드러낼 것인가가 관건이었는데 영화 초·중반부나 민박집에서 미자(문희경), 유리(진혜원)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억양을 드러냈다. 반면 후반부 유리코가 석영과 시간을 가질 때는 억양을 줄이는 식으로 연출해나갔다.

- 현실과 영화, 기억과 상상이 절묘하게 연결되고 넘나든다. 영화에 담긴 이러한 사유가 그림자 등 인상 깊은 이미지로 포착됐다.

= 예전에 살던 집이 아파트 2층이었다. 바깥의 가로등도 딱 2층 높이라 창과 가로등 사이의 나무들 그림자가 비쳤다. 불을 끄고 누우면 블라인드 위로 나무들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맺혀 감상하다 잠들곤 했다. 유리코의 방 창문에 비친 그림자는 기억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일 거다. 또 빛과 그림자는 영화 매체를 비유적으로 가리키기도 하잖나.

- 소품, 장소, 상황 등 영화의 요소는 감독님의 아카이브에 어떤 식으로 존재하나.

= 기본적인 브레인스토밍은 노트에 손필기로 하기도 하는데 이후에는 엑셀로 작업한다. 소품, 의상, 특정 장소나 공간, 특정 제스처 등 다양한 요소를 두루두루 적어둔다. 엑셀의 네모 칸 하나하나가 자유롭게 움직이니까 여기저기 옮기면서 영화의 숏처럼 자유롭게 편집한다.

- 영화 속 인물들은 화면 중앙에 서서 곧잘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한다. 눈물을 흘리던 유리코도 잠시 카메라와 눈을 맞추기도 한다. 마치 관객까지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며 ‘나는 지금 너를 보고 있다’고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영화가 다루는 상황이나 주제를 생각해봤을 때 두 남녀와 어떤 관객이 일종의 삼각관계를 이룬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현실과 상상, 영화를 통해 유리코와 석영, 관객이 만나고 있는 거다. 관객의 입장이 지금 유리코나 석영의 입장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테니 시선을 통해 삼각관계처럼 다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튤립 모양> 전에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장편이 있다고 들었다. 영화를 공부할 때는 무엇에 특히 관심이 많았나.

= 극영화를 공부하면서 시선의 윤리라든가 몽타주 효과 등에 관해 실험을 해왔다. 졸업 작품은 초저예산으로 장편 길이의 영화를 만들었다. 자살을 시도한 한 여자가 재활차 신학교에 들어가서 비슷한 또래의 신학대학생 한명, 정원사 한명, 이렇게 두명의 남자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영화에도 시선이나 영화 매체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 레퍼런스 삼은 영화는 없다고 들었다. <튤립 모양>의 화면 비율도 영화의 컬러도 흑백영화에 가까운 만큼, 좋아하는 흑백영화 혹은 감독을 말해 달라.

= 좋아하는 감독이 많지만 영화에 일본 소재가 들어갔으니 시미즈 히로시와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을 꼽고 싶다. 시미즈 히로시의 영화는 세상의 이런저런 아름다움들을 새롭게 보게 한다.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영화 중 전편이 남아 있는 영화는 단 세편뿐인데 전부 좋다. 기본적으로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고정숏 속에서 대단히 겸손한 듯하면서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풍부하게 펼쳐놨다. 역시 아름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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