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찬사가 민망하게도 <존 윅4>의 액션은 다소 조악하고 어설프고 가볍다. 솔직한 불평을 늘어놓자면 아무리 봐도 1편만 못하다. <존 윅>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무겁고 피로하고 둔탁해서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한(약간의 과장을 보태 존 윅이란 존재의 존재론적 고통을 형상화한 듯한) 묵직함인데 4편에선 가볍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초반 오사카 콘티넨털 시퀀스는 용서가 힘들 정도인데, 이 유치원생 안무 같은 오리엔탈 코스프레 액션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그나마 초반에 나왔다는 점이다. 점점 괜찮아지는 시퀀스들과 대망의 피날레 덕분에 170분의 앞쪽의 불쾌한 기억이 상당히 희미해진다.
오사카 시퀀스의 민망함의 절정은 존 윅의 가벼운 쌍절곤 액션이다. 총알도 튕겨내는 방탄복을 입은 강력한 적들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작대기질 몇번에 나가떨어진다. 간혹 꿈틀거리면서도 기절한 척하고 있는 것까지 보이는데, 의도된 연출인지 무성의한 결과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쯤 되면 거의 ‘기믹’인데, 이 정도는 받아들여주셔야 앞으로 일어날 말도 안되는 일들을 넘어갈 수 있다는 통과의례였을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불필요한 걱정이다. 이미 4편까지 함께하며 충분히 길들여진 입장에선 무례해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시퀀스의 형편없는 코스프레 액션이야말로 <존 윅> 시리즈를 지탱해온 뻔뻔함의 핵심이자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초과하는 액션의 재해
<존 윅4>가 성실히 쌓아온 액션 시리즈의 대망의 피날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속편이란 본래 안일한 자기 복제의 열화판을 양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존 윅4>가 적어도 컨셉을 흔들지 않고 제대로 마무리를 한 것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4편까지 끌고 온 시리즈가 그러긴 쉽지 않다. 옆 동네 <분노의 질주> 시리즈만 봐도 명확하지 않은가. 스트리트 레이싱으로 출발한 영화는 이제 대폭발 액션 블록버스터로 선회, 제목과 배우들만 같지 완전히 다른 영화로 탈바꿈해 명맥을 유지 중이다. 그에 반해 <존 윅>은 저예산 컨셉 무비였던 시절의 본질을 크게 건드리지 않고 잘도 여기까지 왔다. 그 본질이라 함은 이 시리즈의 변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 존 윅이라는 기본값이다.
엄밀히 말해 <존 윅> 시리즈도 <분노의 질주>와 비슷한 과정을 겪긴 했다. <존 윅> 1편은 (저예산의) 컨셉 무비였다. 명확한 컨셉을 설정하고 여기에 합의하면 그다음부턴 눈치 보지 않고 액션을 전시하는 구성을 따른다. <존 윅>의 컨셉, 그러니까 게임의 룰은 두 가지다. 첫째, 말을 줄이고 몸으로 행할 것, 둘째, 그럼에도 최소한의 설명과 설정은 해줄 것. <존 윅> 1편은 컨셉 자체를 오락의 동력으로 삼는 영화였다. 절대 건드려선 안되는 재앙과도 같은 킬러가 있고, 누군가가 그의 소중한 걸 건드렸고, 철저히 박살난다는 컨셉. 이유는 최소한이고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폭력으로 대상을 쓸어버리는 과정을 즐기는 영화.
여기서 핵심은 의외로 최소한의 이유를 ‘굳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키우던 개를 죽여서? 사랑하는 아내를 연상시키는 개라서? 어떤 이유를 갖다붙여도 존 윅의 대량 학살을 납득할 만한 근거가 되진 못한다. 사실 설득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존 윅>은 행동과 원인의 갭 차이, 간극을 유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는 것과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존 윅> 시리즈는 모든 상황에 근거를 제공하긴 한다. 총알을 막을 수 있는 건 방탄 정장 덕분이고, 은밀히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정보상인들의 힘이며, 킬러들이 활보할 수 있는 건 최고회의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 덕분이다. ‘저게 말이 돼?’라는 상황에 대해 <존 윅> 시리즈는 짧게 한줄이라도 답을 해왔다. 정확히는 딱 한줄 이상 답하지 않았다. 존 윅과 뉴욕 콘티넨털의 점장이 만날 때마다 “조나단”, “윈스턴”이라고 이름만 주고받으면 모든 설명이 끝나는 것처럼.
<존 윅> 시리즈는 소위 말하는 개연성과 행동의 근거, 상황의 리얼리티에 대해 딱 한줄의 짧은 답변 후에는 이 악물고 모른 척하며 ‘지상 최대의 (액션) 쇼’를 진행시킨다. 이때 핵심은 단 한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길어선 안된다. 단 한줄밖에 제공되지 않는 뻔뻔함이 도리어 말도 안되는 액션이나 상황과의 간격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오히려 유희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면 초반 눈이 먼 케인(견자단)을 위해 디자인된 초인종 액션은 그 이후에 비슷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존 윅> 속 액션(이라 부르고 학살이라 읽는 행위들)은 철저히 간격이 벌어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관객은 이유를 초과하는 액션의 향연을 보면서 존 윅의 비이성적인 행동이 불러오는 파국의 위력에 열광한다. 마치 불가항력의 자연재해처럼. 다만 이 인간 재해의 스포트라이트는 피해자가 아닌 순수한 액션의 스펙터클에 맺혀 있다. 그리하여 존 윅의 학살은 스포츠 경기의 점수처럼 카운트된다.
초심을 지킨 영면의 길
사실 ‘존 윅’의 서사는 1편에서 종료됐다. 이후에 이어지는 건 기본값이었던 존 윅을 불변값으로 변환시킨 뒤 상황을 변주하는 일이다. 캐릭터 존 윅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상황, 정확히는 감히 건드려봤다가 터져나가는 주변이다. 인물로서 존 윅은 정지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욕망을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정의 내려주는데 그에 의하면 ‘존 윅’이라는 현상은 “복수에 중독된 존재”이자 “묘지를 찾아다니는 망령”이다. 그의 서사는 아내가 죽었을 때 이미 끝이 났다. 개의 죽음으로 불씨가 댕겨진 화산은 주변을 완전히 전소시킬 때까지 꺼질 수 없다. 이렇듯 캐릭터의 서사상 이미 끝난 영화를 <존 윅> 시리즈는 기발한 방법으로 되살린다. 존 윅을 고정값, 다시 말해 배경으로 두고 주변 상황들을 계속 교체, 변주시켜온 것이다. 그리하여 시리즈의 진정한 초석을 다진 2편이 탄생했다.
1편이 ‘존 윅’이라는 현상에 기대어 가는 컨셉 무비였다면 2편부터 본격적으로 세계관을 깔아 시리즈로 진화했다. 최고회의의 존재, 표식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등 킬러들의 룰을 내세우며 이 세계관이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 것이다. 동시에 여기서부터 태생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존 윅은 불변값이다. 죽음이라는 완전한 정지 이외에는 이 상황을 멈출 방법이 없다. 그런데 존 윅이 죽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그는 주변에 끊임없이 죽음을 흩뿌리고 다녀야 한다. 그게 <존 윅> 시리즈의 유일무이한 동력이자 매력이며 초심이다.
만약 여기서 생명 연장의 욕심을 부렸다면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존 윅에게 갑자기 없던 서사를 부여할 수도 있고, 영원히 죽음을 흩뿌리고 다니는 저승사자로 소비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다행히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은 “존 윅이라는 관념”을 함부로 터치하지 않고 그에게 안식을 제공했다. 3편의 밀도가 떨어지는 물리적 확장 이후 4편에서는 처음으로 돌아가(여기서 처음은 2편이다) 다시금 스테이지를 구성한다. <존 윅>이 ‘게임 같다’고 느낀다면 그건 특정 시퀀스의 연출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 디자인 방식 때문이다. 최소한의 동기를 가진 캐릭터가 주어지고, 그가 뛰어놀 세계관이 갖춰진 뒤 해야 할 일은 매 시퀀스 다양한 액션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존 윅4>는 오사카 콘티넨털로 시작하여 베를린 지하의 킬라(스콧 애드킨스)와의 대결, 파리 개선문의 자동차 액션, 실내의 총격 시퀀스, 222 계단 시퀀스, 마지막으로 사크레쾨르 성당 앞 일출의 대결까지 6개의 스테이지를 마련한다. 액션영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형적인 아케이드 게임에 더 익숙한 구성이다.
다시 말하지만 존 윅은 불변값이다(심지어 레벨업도 없다). 변해야 하는 건 스테이지와 적이다. 그에 따라 액션의 장르도 조금씩 바뀐다. 극도로 얇은 서사에도 불구하고 17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바로 이같은 다채로운 구성 덕분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존 윅4>는 대여섯개의 짧은 에피소드를 묶어놓은 단편 시리즈라고 봐도 무방하다. 매 에피소드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어떤 에피소드는 성공적이고 어떤 에피소드는 실패한다. 관점을 달리하자면 비록 몇몇 아쉬움이 있더라도 만족의 평균치를 올릴 수 있는 전략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줄을 세워보자면 개선문 이후 이어지는 제8구역의 건물 시퀀스는 성공적이었다. 일단 존 윅에게 발사의 궤적까지 선명히 보이는 화염 산탄총이 주어졌고 이를 명확히 조망할 수 있도록 부감숏으로 전환된다. 액션의 합이나 구성이 달라진 건 없다. 달라진 건 아이템과 그에 최적화된 시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장르로서의 액션은 새로운 동작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그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달렸다. 요컨대 공간과 시점이 주인공이다.
다시 돌아가 이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역시 최악은 오사카 콘티넨털 호텔 시퀀스였다. 일단 가볍다. <존 윅>은 애초에 ‘본 시리즈’처럼 눈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현란하고 빠른 속도의 사실적인 액션을 추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반대로 묵직하고 느려서 더 아파 보이는 타격감을 추구한다. 물론 그게 꼭 리얼리티를 담보한다고 할 순 없다. 이건 단지 액션의 방향성과 톤의 차이일 뿐이다. 느리기에 더 정확하게 동작이 눈에 들어오고 상황 파악이 되는, 정확한 합의 액션 발레. 그런데 여기에 동양적인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어설프게 옷을 입히는 순간 특유의 질량을 잃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견자단 캐스팅이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지만 그 탓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추적자 노바디(셰미어 앤더슨) 같은 캐릭터도 존 윅의 원맨쇼로는 어쩌면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괜한 우려, 혹은 사족처럼 느껴진다. 또는 이제 퇴장할 존 윅의 행보를 정리해줄 관찰자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괜한 걱정들이 <존 윅>의 생명력이 다했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이제 공간이 주인공이 된 <존 윅>의 탐미적 액션은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본질을 건드리는 순간 시리즈의 영혼마저 상처 입는다. 적어도 초반엔 그런 징후가 보였다.
전설이 될 영원의 길
기본값만 훼손하지 않는다면 <존 윅>의 액션은 이론적으로는 끊임없는 변주와 재소비가 가능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총을 쏘는 게 아니라 던져서 맞추는 용도로 활용하는 꼴을 보며 이제 한번쯤 멈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게 멋들어진 방탄 정장 설정 때문이다. 얼굴만 가리면 총을 맞아도 나풀거리지도 않는 무적의 방탄 천.) 한때는 참신하고 멋져 보였던 컨셉이 스스로를 잡아먹기 시작할 때 그 신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스타헬스키 감독과 키아누 리브스는 ‘존 윅’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착취하지 않았다. 더 망가지기 전에 전진 대신 정지를 선택한 이들의 애정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존 윅>의 세계관은 생생하므로 내년 개봉을 앞둔 영화 <발레리나>나 시리즈 <더 콘티넨털>처럼 다시 뒤로 돌아가 얼마든지 변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 덕분이기도 하리라. 죽음을 각오한 코지(사나다 히로유키)는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최대한 많이 죽여주게.” 존 윅은 이번에도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마지막 결투를 앞둔 존 윅과 케인은 예언가가 되어 자신들의 운명을 읊조린다. “죽고자 하는 자 살고 살고자 하는 자 죽으리.” 묘비명을 보고도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에도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기꺼이 무덤을 파내어 되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자본의 욕망이다) 어쨌든 ‘좋은 남편’은 영면에 들었고 ‘존 윅’은 비로소 영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