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정면에서 얼굴을 바라본다. <토리와 로키타>의 첫 장면은 역설적이다. 난민 체류증 발급 심사를 받는 로키타의 얼굴이 화면 가운데 있지만, 그녀는 프레임의 중심부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환대받지 못하는 난민으로 도착해 있고, 이곳에 그녀를 위한 장소 역시 마련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니?” 이민국 직원이 건네는 질문은 그래서 로키타의 얼굴에 불투명한 가장을 덧댄다.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기 위해 거짓된 말로 능숙하게 답변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된다. “학교 근처 호수 이름은 생각나니?” “중학교 교장은 남자였니 여자였니?” 하지만 로키타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공황발작 약을 먹는다. 그제야 흔들리던 카메라가 수평으로 움직여 로키타의 얼굴을 외면하고 발급 심사가 중단된다. 서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숏의 표면에서도 로키타는 임시적인 체류와 감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감독인 다르덴 형제는 단호하게 말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이민자를 환대하지 않는 유럽 사회에 관한 고발과 분노를 보여주는 영화이자 현실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난민들의 헌신과 우정에 관한 영화다.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이야기에는 모호함이 없다. 다르덴이 소묘하는 인물들은 잔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인하고 이따금 아름답지만, 이 영화에서는 사건과 주제의 강도가 그들이 마주하는 삶의 질감에 앞서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한 인물의 죽음과 남은 자들의 장례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은 현실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단면을 환기하는 대신 극적이고 감정적인 효과에 사로잡힌 상투형의 결론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이 영화가 시급한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지만 그에 걸맞은 영화적 성취를 획득하지 못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아마도 이런 직접적인 현실로의 개입 의지와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의존하는 선명한 서사 궤적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언제나 공동체와 타자라는 사회적 문제를 근심했지만, 이번처럼 의제에 대한 확신과 분노를 품었던 적은 드물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비판하는 견해가 존재할 것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입장이라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인물을 도구적 장치로 희생시키는 선택 자체를 비판하는 관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야말로 구체적인 영화에 우선해서 세워진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개별적인 장면에 적용한다는 혐의를 벗지 못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서사를 다듬고 주제를 전하는 맥락과는 다른 지점에서 특별한 감각을 건네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서사와 주제에 봉사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멈춰 선 인간의 표상이 아니라 거주할 곳을 얻지 못한 인물이 특정한 장소를 오고 가며 잠입과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첫 장면이 주의 깊게 전해주는 것은 카메라가 비추는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이 화면을 이탈하는 순간의 감각이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사나 주제의 단위로 환원되지 않는 영화의 불순한 시선과 움직임이 발생한다.
춥고 배고픈
이 영화의 무대는 마약과 돈의 유통으로 연결되는 도시 공간과 그 질서를 배양하는 마약제조공장의 닫힌 공간으로 나뉜다. 토리와 로키타는 레스토랑에서 마약을 전달받고 거리로 나가 고객들에게 물건을 배달한다. 그들은 법의 절차가 포획하지 못하는 불법 유통의 경로에 던져져 있다. 두 사람은 약속된 위치에서 정해진 사람들과 거래를 나눈다(이 대목에서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한 한명의 단역이 깊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돈이 부족해 가장 적은 유통 단위의 마약조차 구매하지 못하는 빈곤한 마약중독자 노인은 로키타에게 더 적은 양을 구매할 수는 없냐고 묻는다. 뜻밖의 질문에 로키타는 전화를 걸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로키타의 말에 돈을 빌려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뜨는 노인의 모습에는 서사의 맥락으로 수습되지 않는 피로의 정동이 새겨져 있다. 무척 사적인 감상이지만, 그 노인이 전하는 피로는 로키타에게 새겨지는 노동의 피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은 빈곤한 자들의 우연한 만남과 교류를 가로막는다). 그들의 동선과 행위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조정되고 있다. 그리고 로키타가 난민 신청 심사에서 탈락하면서, 정해진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희박한 자유마저 박탈당한다. 로키타는 위조 체류증을 얻는 대가로 불가피하게 마약을 재배하는 공장에 갇혀 일하게 된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의 주된 배경인 벨기에의 도심, 두 인물의 고향으로 암시되는 카메룬과 베냉, 그리고 그들이 유럽에서의 체류를 위해 남매 행세를 시작한 밀항선이 형성하는 지정학적 관계에 이렇다 할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벨기에에 도착한 두 인물은 쉼터에서 잠을 자고 레스토랑에서 마약을 전달받은 뒤 거리의 고객들에게 판매한다. 쉼터에서 레스토랑으로, 그리고 특정한 장소라고 말하기 어려운 도로와 거리로 이어지는 장면의 연쇄는 거주할 장소를 얻지 못한 그들의 환경을 화면에 적시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공간을 오고 가는 노동의 조건 아래서 피로와 배고픔에 노출되어 있다. 이 영화가 공간에 부여하는 성질은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앞서 말했듯이, 유럽 안의 국외자인 토리와 로키타는 삶의 환경을 결정할 수 있는 장소를 얻지 못한다. 잠을 자는 곳도, 노동하는 곳도 직접 선택할 수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수동적인 조건에서 모든 것들이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던져진 벨기에는 지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샹탈 아커만의 단편영화 제목처럼 ‘춥고 배고픈’ 환경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도시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배고픔을 호소하고, 도로를 위태롭게 횡단하며, 벽에 몸을 부딪친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공간이 몸의 감각을 건드리는 체감의 장소로 재편되는 것이다.
이는 로키타가 마약제조공장에서 열기로 인해 땀을 흘리고 약을 먹지 않아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환경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반응을 불러낸다. 로키타는 정규적인 직업과 거주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을 원하지만, 역설적으로 밀실의 노동환경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공장 내부는 마치 난민들이 타고 온 선박처럼 여러 개의 방과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로키타는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주어진 공간의 모양은 바뀌지 않는다. <토리와 로키타>에서 세계는 거대한 밀실이자 공장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어진 노동을 수행하는데도 배제와 폭력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이 갇혀 있는 수인(囚人)이며, 공장의 기계적 부품이다. <토리와 로키타>에서 다르덴의 인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운명의 강도 앞에서 자동인형처럼 다뤄진다.
두 얼굴이 다시 만나기까지
하지만 픽션의 역량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 시스템의 질서가 강제하는 동선으로부터 이탈해 다른 방향과 공간을 창조하는 데 있다. 토리는 로키타와 재회하기 위해 자동차에 숨어들어 닫혀 있는 마약제조공장에 잠입한다. 토리는 환기구 틈새로 벌어진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간다. 다르덴 형제는 어린아이가 몸을 숨기고 실내 공간으로 몰래 들어가는 절차를 긴 시간 동안 생략 없이 관찰한다. 다르덴은 이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장소인 공장 내부의 환풍구와 통로를 정교하게 파악했다고 말한다. 토리의 동선을 관측하는 것은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서로 동떨어진 두개의 얼굴이 다시 마주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지속하는 것을 하나의 과업으로 삼는다.
<토리와 로키타>가 출구 없는 시공간을 전제한다면, 이 영화의 한 장면은 닫힌 문에 구멍을 내는 시도를 보여줄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제도가 강제하는 난처한 얼굴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은 미세한 빛이 새어드는 구멍 사이로 나타난 로키타의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토리는 로키타와 만나기 위해 틈을 만들어낸다. 그는 달리고, 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에 다가간다. 작은 틈새로 빛이 들어오고 만남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 영화는 토리와 로키타라는 두 인물이 합법적 체류 절차와 불법 노동의 간극에서 착취당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그 사이를 잇는 다른 경로를 만들어내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는 그들을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보여주지 않”는다. 미세한 빛이 새어드는 자리에서 로키타의 얼굴이 프레임에 붙잡힌다. 그때의 만남은 첫 장면에서 우리가 지켜본 얼굴의 대면과는 다른 표정을 마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이 어둠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이 공장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잊기 힘든 모습이 묘사된다. 다리를 다친 로키타를 부축하던 토리가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포대를 깔고 높은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장면이다. 목숨이 걸린 긴박한 도주가 유년기의 놀이 같은 외형으로 전환되는 이 순간에는 잠깐의 독특한 활력과 해방감이 감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실제 남매가 아니기에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유년기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이 순간이 전하는 갑작스러운 감각의 전환은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운명을 환기한다. 벨기에에 도착하지 않을 수 있었고, 두 사람이 모두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로키타가 꿈꾸던 가사도우미가 될 수도 있었던 다른 운명을 말이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통과하는 물리적인 동선으로부터 픽션이 산출하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는 다르덴 형제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추락’이라는 운동에 관한 한 가지 상념을 마주하게 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과 <유로파51>에서 어린 소년은 높은 곳에서 추락한다. 추락을 선택한 아이의 결정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사태로 남겨진다.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명쾌한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추락은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현대적 픽션이 창출한 하나의 질문이다. 추락을 선택한 시신 앞에서 영화는 원인을 찾을 수도, 비밀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무능에 직면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추락과 완전히 포개지는 것은 아니지만, 다르덴 형제의 근작에서도 추락은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타인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적잖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누군가가 던진 돌에 의해 나무에서 추락하는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 한밤중에 누군가의 위협으로 추락해 두개골 파열로 죽은 <언노운 걸>의 흑인 소녀, 사다리에서 추락해 마비 증세를 보이는 <소년 아메드>의 아메드가 일으키는 몸짓은 유사한 계열에 속한다. 그들은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관계의 공백을 바라보면서 불가피한 추락에 직면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추락하는 자들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다른 결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높은 모래 경사면에서 추락하지만, 그것은 부축과 조력으로 이어지는 모험이 된다. 이 영화에서 추락은 죽음이나 고통으로 향하는 사태가 아니라 서로를 살피는 우정의 증거가 된다.
추락에도 불구하고
토리는 다친 로키타의 몸을 살핀다. 승인받지 못한 몸, 공식적인 절차를 통과하지 않은 신체, 성매매와 마약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몸이다. 다르덴은 피로와 고통이 누적된 로키타의 신체가 머무는 옆자리에 토리의 몸을 배치한다. 쉴 틈 없이 뛰어다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될 수만 있다면 경사면에서 떨어지는 일조차도 상쾌한 해방감으로 소화하는 강인한 소년의 몸을. 그러므로 두 사람의 몸이 결탁하는 잠깐의 순간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현실의 고통과 연약함을 드러내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현실에서 얻을 수 없던 생동감을 돌려주기도 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사건의 영화라기보다는 신체를 동작하는 방법에 관한 영화고, 정해진 서사의 결론에 도착하는 영화라기보다 차단된 만남을 가능케 하는 동선을 만들어내는 영화이며, 사회구조가 강제하는 제도적 질서와 그로부터 이탈하려는 몸의 반응이 일으키는 분쟁의 영화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멈추는 자리는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에 로키타를 희생하는 상투형의 결말이 아니다. 주제를 전하기 위해 인물을 체스 말처럼 활용하는 손쉬운 결말도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지탱하던 인물의 움직임이 멈추는 자리다. 하지만 다르덴의 영화에서 견고한 질서에 저항하는 감정은 단 한번의 행동이 남기는 세부적 이미지에 깊이 새겨진다. 다르덴 형제는 소외된 자들의 운명을 주시하는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강렬한 신체적 반응의 창조자다. 카메라에 담기는 신체의 반응은 영화의 두 주인공을 참혹한 현실로 내모는 현실의 질서가 훼손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일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토리와 로키타가 함께 부르던 노래가 들려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멜로드라마적 서사의 결말답지 않게 건조하게 마무리되는 장례식 장면에서 이 영화는 감상적인 애도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추도문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다시 한번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자들의 기억과 감성을 결합한다. 영화는 그런 불가능한 만남을 몽타주하는 평등의 장치라는 것을 다르덴 형제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