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이주현 편집장] 청춘영화의 미덕
2023-06-09
글 : 이주현

지난 주말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시외버스에 몸을 싣기 전 터미널에서 김밥까지 사먹었더니 그야말로 제대로 ‘영화 소풍’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영화제 행사장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오랜만에 만난 영화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인구밀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소도시의 특성상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다 온전히 혼자 된 기분을 만끽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러다 유난히 키 큰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다가가 안내 푯말을 보니 수령이 500년이다. 무주에서만 500년을 산 이 나무는 다른 땅, 다른 하늘이 궁금하지는 않았을까. 나무가 품은 경이로운 시간에 감탄하며 무주를 산책하자 어쩐지 <박하경 여행기>를 찍는 기분이 들었다.

미야케 쇼 감독도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들고 무주산골영화제를 찾았다. 어깨너머로도 그를 보진 못했지만 이번주 특집 기사를 읽으며 그를 꽤 잘 알게 된 느낌이다. <씨네21> 1410호에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개봉에 맞춰 지난 10년간의 일본 독립영화를 돌아보는 특집을 준비했다. 2010년대 이후 일본영화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 새로운 이름들과 산업 생태계의 면면을 살펴보는 기사와 더불어 미야케 쇼와의 긴 인터뷰도 실었는데, 감독의 이야기 중 시간과 관련해 인상적인 대목이 꽤 있다. 미야케 쇼는 청춘영화의 감정이란 “시간을 돌이킬 수 없기에 찾아오는 약간의 멜랑콜리”라면서 “어차피 나이와 관계없이 자신만의 인생은 단 한번밖에 없으므로 그다지 지나간 것을 희구하거나 감상에 젖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인물이 혹은 그 배우가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 청춘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뜨거운 여름을 함께 보낸 세 청춘의 이야기인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와 청각 장애를 가진 프로복서의 이야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은 모두 청춘의 얼굴, 청춘의 마음을 담은 영화들이다. 또한 감독의 표현대로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끈기 있게 응시하는 영화들이다. 이 세상의 절대적 진실은, 시간은 한시도 머물지 않고 흐른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실을 관찰하는 예술가로서 미야케 쇼는 역시나 이런 얘기를 전한다. “내가 영화에서 포착하고 싶은 감각은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적인 시간들의 개별성,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 저마다의 유일성 같은 것이다.” 평범하지만 유일한 시간이 그에겐 가장 영화적인 시간이 된다.

그가 “촬영 전에는 열렬히 산책”하는 감독이라는 대목에서도 이상하게 믿음이 생긴다. 그것은 내가 열렬히 산책을 지지하는 사람이라서일 수도 있는데,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며칠 전 무주에서 만난 500살 된 나무처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어 제목은 <Small, Slow But Steady>다. 거대하고 빠르고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이런 영화를 만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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