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법관이 되어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고강도의 공부를 요구받아온 최강호(이도현)는 불의의 사고를 겪으며 7살의 기억에 멈추고 만다. 아버지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과 죽음을 밝혀내려 했던 그의 복수심까지 그대로 정지되고, 엄마 진영순(라미란)은 이번엔 강호에게 삶을 공부시키려 한다. 먹고 자고 씻는 생존의 모든 규칙과 규율. 체념과 미련 사이를 엇박자로 걸어나가는 모자 곁엔 말 많고 소란스러운 조우리 마을 사람들이 늘 함께한다. 기억을 잃은 아들과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의 관계 회복이라는 텁텁한 소재 사이에도 웃음과 다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완벽한 타인> <극한직업>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나리오를 통해 고유의 농담과 천진한 장난을 보여준 배세영 작가를 만나 첫 드라마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드라마 <나쁜 엄마>는 원래 영화 시나리오로 출발했다고.
=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 2009년만 해도 중년 여성의 서사나 장애를 가진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업계에서 크게 흥미로워하지 않았다. 엄마 캐릭터라고 하면 할머니 느낌을 먼저 떠올리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투자나 캐스팅 등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드라마 작업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오랫동안 잠가둔 <나쁜 엄마>가 먼저 생각났다. 이야기를 확장하기에도 좋은 타이밍이었다.
-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 작업은 그 호흡이 다르다. 나름의 고충도 컸을 텐데.
= 내가 워낙 손이 빨라 영화 시나리오는 대부분 한달 안에 쓴다. 그런데 <나쁜 엄마>는 대본 작업만 3년이 꽉 찼다. 코로나19 기간 내내 이것만 붙잡고 있었다. 영화는 한 공간에 사람을 몰아넣고 2시간여 동안 사건을 진행시키면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번 회차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다음 회차가 궁금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초반엔 드라마 문법을 잘 몰랐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를 TV 앞으로 다시 데려올 것인가, 그 엔딩 포인트를 잡는 게 중요했다. 매회 영화 한편을 완성하는 공력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심나연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이 워낙 드라마에 강한 분들이라 힘을 많이 얻었다.
- <나쁜 엄마>는 영화로서는 2009년, 드라마로는 2020년에 구상됐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청자도 많이 바뀌었는데, 시의성에 흔들리지 않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 드라마의 주제를 믿었다. 7살 된 아들에게 삶을 교육하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의 사랑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대껴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흔들려선 안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이러한 주제가 수용되고, 또 어떤 시대에는 수용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도 너무 슬플 것 같다
- 사고로 7살의 기억을 갖게 된 검사 아들과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엄마. 처음 설정은 여기까지였지만 드라마에는 아버지를 위한 복수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 대본을 쓰는데 문득 한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왜 엄마는 아들에게 그렇게까지 법관이 되라고 했을까? 왜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길 자처해야 했을까? 주인공의 전사가 개연성 있게 채워져야 시청자도 그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응원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작업을 하다보면 제작 과정의 다양한 이해관계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의도와 개연성을 놓치기도 한다. 시나리오작가의 작은 비애랄까. (웃음) 그런 점에서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는 작가의 의도를 비교적 높은 비율로 반영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늘 궁금했다. 내가 쓴 이야기를 온전히 보여주고, 그에 대한 평가도 모두 내가 책임지면 기분이 어떨까?
- 가족의 애환을 녹인 장면에는 그 안에 담긴 슬픔이 무척 구체적이다. 자신에게 예정된 장례 절차를 영순이 아들에게 알려주는 장면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슬픔은 어떻게 그려냈나.
= 작품을 오래 갖고 있다보니 엄마들에 관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차곡차곡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 안에 농축된 슬픔이 남게 된 것 같다. 영순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강호가 안정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자신이 죽었을 때 슬퍼하며 타인에게 의존하기보다 상주로서 해야 할 일을 잘 치르길 바랐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식주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돼지농장도 영순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대변한 장치다. 돼지는 보통 28일 동안 새끼들과 함께 지내면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습성을 가르치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모든 걸 강호에게 가르치려는 영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실 암이라는 설정은 나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 제한은 이 이야기에 너무도 절실한 요소였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독해질 이유도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지점이었다.
-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된 것은 7살의 기억을 가진 강호가 밥 먹기를 거부하던 끝에 “배부르면 잠 와. 잠 오면 공부 못해”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부모가 남긴 모진 말을 기억한다.
= 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슬프다. 지금 또 눈물날 것 같다. (웃음) 유독 이 장면을 쓰면서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오랜 침묵 끝에 아들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 무엇이어야 할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강호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은 말이 엄마의 모진 말이다. 어린 강호가 유독 그 말을 기억한 건 어렸을 적 엄마의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을 반복하다보니 살기 위한 주문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것에 가깝다. 그래서 어른이 된 과거의 강호가 그런 말을 하지 않나. 엄마가 나를 이토록 억압하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 그럼에도 배세영 작가 특유의 코미디를 잃지 않는다. 조우리 마을 사람들이 가진 개성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 <나쁜 엄마>가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고 생각했다. 주변 인물이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지 않으면 한없이 우울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변 인물을 조금은 오버스럽더라도 재미있게 설정하고자 했다. 내가 평소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극한직업>처럼 어떤 일에 휘말리면서 뜻하지 않게 어딘가에 머물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게 바로 상추 키우는 청년 둘이다. 강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빌런 오태수(정웅인)와 달리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을에 동화되면서 함께하게 된다. 또 무엇보다 일상에 있을 법한 빌런도 만들고 싶었다. 영순이 돼지농장을 운영하는데 실제 농가에서 무수한 민원을 받는다고 한다. 냄새 때문에. 그런 고충을 반영하고 싶지만 마을 사람들이 영순이를 비난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게 트롯백(백현진)이다. 사실 트롯백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영순에게 암이라는 고백을 듣고, 조우리 마을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가서 “엄마가 좋아하는 트로트 콘서트 홀 지어주겠다는 약속은 못 지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너무 신파가 될 수 있어 빠졌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게 있다. 박보경 배우가 분한 이장 부인이자 호랑이 엄마는 늘 마스크 팩을 쓰고 나온다. PPL인가.
= 전혀 아니다. (웃음) 촬영이 어려운 돼지농장을 찾기 위해 큰 도움을 받은 한돈 외에는 PPL이 없다. 여기에도 호랑이 엄마에게 마스크를 덧씌운 이유가 있다. 마을 사람들 중 그는 유일하게 입바른 말을 한다. 톡톡 쏘며 촌철살인을 날린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그가 그런 태도를 지닐 수 있었던 건 익명성이 보장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을 함께 건넨다. ‘진짜 가면을 쓰고 있는 건 누구지?’ 하면서. 오태수와 송우벽(최무성)은? 다른 마을 사람들은 진솔한가?
- 코미디의 정수로 여겨지던 배우 라미란의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캐스팅 비화가 궁금하다.
= 영순 역으로 라미란 배우가 일찍 캐스팅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앉아서 정말 펑펑 울었다, 펑펑. 대본을 쓰는 데 들인 지난 3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방송을 보고 더 깜짝 놀랐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중도를 지키며 영순을 그려내더라. 라미란 배우의 연기는 늘 좋지만 정말 어딘가 실존하는 사람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 드라마는 영순이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설명해주지만 이해의 바탕을 만들어주는 것치고 영순은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했다. 시청자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소풍을 보내지 않거나, 밥을 적게 먹이는 것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소풍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씨랜드 화재 사건이나 세월호 참사 등 아이들에게 한순간에 벌어진 사고들이 많지 않나. 엄마로서 너무 불안했다. 영순 또한 자신이 김밥을 싸서 보낸 부모와 남편 모두 죽은, 하나의 징크스처럼 느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영순의 경험은 단순한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행한 후 벌어진 일들이라 강박과 불안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영순이 강호에게 하는 행동은 공부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압박하는 여느 학원가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는 내가 “너무 과한가?”라고 묻자 보조 작가들과 제작진이 “현실은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하더라. 아무리 좋은 의도여도 그렇게 해선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단 걸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쁜 엄마>에는 여러 엄마가 등장한다. 강호 엄마 영순, 미주 엄마 정씨(강말금), 삼식 엄마 박씨(서이숙), 그리고 미주(안은진)까지. 이들은 자식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각자 나름의 나쁨을 자처한다.
= 박씨는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했을 때 누군가 욕하는 게 싫어서 더 나서서 욕하고 때린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주기보다 자신이 나쁜 엄마가 됨으로써 지켜주려 한다. 그리고 정씨는 미주를 홀로 키우면서 미주에게 좋지 않은 가정 환경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주는 돈 버느라 아이들을 떼어놓고 지냈고. 그런데 실제로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을 좋은 엄마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작가로 돈을 벌지만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해 나쁜 엄마고, 내 친구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없어 스스로 나쁜 엄마라 칭한다. 돈을 벌어도 못 벌어도, 뭘 먹여도 못 먹여도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나쁜 엄마>라는 제목이 결국 누구의 관점에서 나쁜 엄마냐는 열린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