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샌가 애니메이션 제작사 레드독컬처하우스는 <러브, 데스 + 로봇> 등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엔 굴지의 게임 콘텐츠 IP <드래곤 에이지>를 기반으로 <드래곤 에이지: 앱솔루션>을 자체 제작하며 입지를 다졌다. 얼마 전 개봉한 한지원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 <그 여름>에서도 레드독컬처하우스는 메인 프로덕션사로서 실력을 입증했다. 이처럼 굵직한 국내외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그들의 정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양산업이라 불리던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활로를 개척하며 승승장구 중인 레드독컬처하우스의 배기용 대표를 만났다.
- 애니메이션계에 입문한 계기는.
= 1998년,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시작이었다. 당시 살던 춘천이 애니메이션 도시를 표명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막 생겨나던 터라 그림을 좋아하던 친구들과 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25년 동안 한 우물만 파고 있다. 26살 때 두루픽스에서 <토리 GO! GO!>라는 작품으로 입봉했다. 그러곤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소중한 날의 꿈>에 참여하고 <겨울연가>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제작사와 협업했다. 2010년에 스튜디오 미르 창립 멤버로 들어가 <코라의 전설> 같은 미국 애니메이션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경험을 쌓다가 2014년에 레드독컬처하우스를 세워 운영 중이다.
- 애니메이션 강국이라는 미국, 일본의 제작 환경을 모두 경험했다. 어떤 차이가 있나.
= 가장 다른 건 제작 규모다. 기본적으로 작품에 들어가는 그림의 매수에서 차이가 난다. 가령 지금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저 문으로 나가는 장면을 구현한다 치자. 미국은 제작비가 넉넉한 만큼 많은 그림을 투입한다. 한컷 안에 필요한 액션을 다 담으면서 부드럽고 풍성한 움직임을 만들 수 있다. 반면에 비교적 제작비가 열악한 일본은 컷을 구분해서 의자에서 일어나는 장면, 문 여는 장면을 되도록 간단하게 이어 붙인다. 한편으론 적은 제작비 덕에 스타일리시하고 독특한 연출이 효과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레이아웃, 원화, 동화, 촬영으로 이어지는 제작 시스템은 비슷하다.
- 한지원 감독의 <그 여름>에 참여했다. 레드독컬처하우스는 메인 프로덕션을 담당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진의 구체적인 포지셔닝도 궁금하다.
= 실사영화에 익숙한 분들은 애니메이션 엔딩크레딧을 보면서 “뭐 저렇게 감독이 많냐”고 궁금해한다. 설명하자면 우선 한지원 감독이 총감독으로서 전체적인 각색, 스토리보드, 화면 구성, 연출의 흐름을 설계했다. 그리고 우리 쪽에선 애니메이션적 움직임을 유려하게 만드는 작화감독이나 촬영감독 등의 직책을 주로 맡았다.
- 한지원 감독 측에서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고 하던데.
= 평소 한지원 감독과 꼭 한번 같이 작업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한국의 곤 사토시’라 느끼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비주얼을 구현하는 성향이 굉장히 독특하고 대단하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웃음)
- <그 여름>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레드독컬처하우스도 웹툰, 웹소설, 애니메이션 등에 걸친 콘텐츠 IP 산업에 몰두 중이다.
= 회사를 만들 때부터 생각한 방향성이다. 우리가 일본 같은 애니메이션 강대국이 되려면 좋은 기술력과 기획력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원작의 인지도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수익 모델과 팬덤을 구축하고 기획 단계의 비용이나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이를테면 웹소설 원작의 웹툰 <이계 검왕 생존기>는 카카오페이지, 일본의 피코마, 중국의 콰이칸 등 각국의 유명 웹툰 플랫폼에서 1등을 거친 후에 이제 애니메이션 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 레드독컬처하우스의 안정적인 성장 배경으로 <러브, 데스 + 로봇> (시즌1 <굿 헌팅>)이나 <위쳐: 늑대의 악몽>의 참여 그리고 <드래곤 에이지: 앱솔루션>의 자체 제작을 빼놓긴 어렵다.
= <러브, 데스 + 로봇>의 작업 제안은 회사의 페이스북 메시지로 왔다. 스팸인 줄 알았다. (웃음) 포트폴리오를 보내라기에 보낸 뒤 3달 정도 답이 없어서 ‘그럼 그렇지’ 하면서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생각지 못한 때에 메일이 오면서 본격적으로 넷플릭스와 연을 맺게 됐다. 회사가 시작 단계였던 터라 회사 단위의 포트폴리오가 많지는 않았다. 이대우, 진형민, 김성민 감독 등 회사에 있던 업계 베테랑들의 개인 실력이 출중하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넷플릭스와는 꾸준히 작업을 논의 중이니 다음엔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고 싶다.
- 한국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은 고질적으로 약소하단 평가가 많다. 이유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가.
= 회사를 운영하며 가장 뿌듯함을 느끼는 건 직원들에게 4대 보험, 급여제를 보장해준단 점이다. 요즘 시대에 이게 무슨 뿌듯한 일이냐 싶겠지만 당장 10년 전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전의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대개 해외 제작사의 OEM(주문자위탁생산) 수주를 받아 프리 랜서 애니메이터나 직원들을 기용했다. 애니메이션은 그림 실력뿐 아니라 못해도 2년, 길게는 5년 정도 현장에서 배워야 할 구체적 직무 역량이 많다. 그런데 불안정한 고용 탓에 인재들이 착실하게 커갈 환경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예전에 한국이 미국, 일본보다 경제 규모가 현저히 작을 때야 OEM으로 돈을 잘 벌었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런 방식으론 큰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됐다.
사양산업으로 취급받다가 우리 회사뿐 아니라 스튜디오 미르, 스튜디오 뿌리처럼 실력 있는 제작사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체계적인 산업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다. 안정적인 제작 시스 템, 한지원 감독처럼 크리에이티브한 인재들이 서로 뭉친다면 한국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산업 환경이 왕성하게 바뀔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