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드림팰리스’, 욕망의 성취도, 연대도 실패한 자리에는
2023-06-21
글 : 소은성

아파트는 더이상 집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신분이 드러나는 지표이고, 또한 그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공통의 감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투사되는 선망과 원한은 동시대의 문화적 감정구조에 있어 핵심이다. 지난해 가장 문제적 작품이었던 <안나>와 <작은 아씨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적 계급의 개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연화된 ‘신분’이 차지한다. 주어진 신분의 극복이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아파트는 그에 따른 갈등 상황을 첨예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된다. <안나>에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 안나(수지)는 가짜 신분으로 통행증을 얻은 셈인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숨어 다닌다.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가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모험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동기 역시 자신의 신분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아파트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망이 원한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욕망의 대상이 실은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언급한 두 아파트가 결코 동일한 욕망을 가리킬 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주어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상층부에 도달하기 위한 도박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신분의 질서 또한 그것을 선망할 수 있다는 자체의 구조로부터 실체가 없는, 한낱 믿음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신분 질서를 대변하는 아파트에 대한 선망은 동시에 그것의 불안을 감각하는 일이다. 원한은 그러한 불안의 해소를 위한, 그 실체 없음에 저항하기 위한 방어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성취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적대를 상상해냄으로써 애초부터 그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임을 은폐한다. 이 점에서 <안나>와 <작은 아씨들>은 물론이고, 논지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더 글로리>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한국 사회의 병폐들은 선망과 원한의 착종 관계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영화 <드림팰리스>의 성취를 리얼리즘에 관련된 어떤 것으로 돌려야 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했다거나 관객의 심리적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배우들의 연기를 연출해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한을 통해 선망을 재생산하는 자기 파괴적인 도식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혜정(김선영)에게 신도시 아파트 ‘드림팰리스’는 선망의 대상이기에 앞서, 남편을 잃게 된 산업재해의 진상 규명에 대한 욕망이 좌절되어 생긴 결과물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사측과의 합의라는 형태로, 그 좌절의 원인의 일부를 혜정에게도 부여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이미지로 자본을 실체화하지 않고 비워놓은 자리에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인 혜정 스스로가 자본의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원한의 대상을 외부에서만 찾을 수 없는 처지다.영화의 이러한 구도는 아파트가 더이상 선망의 공간일 수만은 없다는 불안의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이것은 소위 ‘부동산 스릴러’라고 불렸던 <숨바꼭질>이나 <목격자>와 같은 영화들에서 불안을 구체적인 공포의 대상, 사유 재산인 사적 공간을 침입하는 외부자로 특정된 어떤 원한의 대상에 전이시켜 다루어낸 경우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영화들에서 공포에 노출된 인물들은 부지불식간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거나, 선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드림팰리스>의 혜정은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피해자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원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캐릭터다. 요컨대, 드림팰리스의 침입자는 혜정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침입자인 그가 완전한 자본의 대리인이 되기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공간인 드림팰리스에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입주 첫날부터 쏟아지는 녹물 때문에 사기를 당한 것 아니냐며 분양사무소를 찾아가 따지던 혜정은 분양사 직원의 (인센티브를 챙겨주겠다는 꾐을 포함한) 권유에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분양 홍보물을 제작한다. 본인과 마찬가지로 남편을 잃고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을 함께했던 수인(이윤지)이 사측의 제안에 마침내 흔들리자, 혜정은 그를 위로하며 (동시에 혜정 자신을 위로하며) 제안을 수용하라고 조언하고 드림팰리스로의 입주를 권한다. 하지만 이 권유는 이중의 실수였음이 금세 드러난다. 하나는 혜정의 소개와 함께 정상적인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인에게 판매된 분양권은 아파트 가격의 하락에 반영되고, 그것에 거세게 반발하는 기존 입주민들이 혜정에게 책임을 묻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혜정이 자본의 충실한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수인이 자각하게 만든 것이다. 잠깐 회복되었던 참사 피해 유족들인 수인과 혜정의 연대는 다시 깨져버리고, 혜정은 결국 기존 입주민들의 편에 선다. 혜정은 ‘비상대책위’가 자신의 집을 이용하도록 내주고,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인을 포함한 신규 입주자들의 아파트 단지 진입을 저지한다.

하지만 영화 <드림팰리스>가 누구도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는 현실의 핍진한 묘사를 통해서만 리얼리즘적 성취에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서사에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이탈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지하주차장에서 혜정이 입주자 대표의 차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장면, 또는 그 입주자 대표를 수인과 혜정의 아들이 타고 있는 이삿짐 트럭이 들이받고 난 뒤 성난 입주자들이 그들을 둘러싸는 장면이 그렇다. 영화는 제시된 장면들의 결과가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 고립된 장면들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드림팰리스의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된 혜정은 새로운 입주자가 돌리는 떡을 받으면서 자신의 집에 가족 세명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혜정이 원했던 아파트에서의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벽들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힌 듯 서 있는 혜정의 모습은 영화가 앞선 장면들에서부터 쌓아온 고립의 이미지를 완성시킨다.

혜정이 차의 뒤편 유리창에 붙여놓았던 ‘단결투쟁’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떼어내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했던 영화는 그가 고립을 피해 구하고자 했던 연대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참사 피해 유가족들의 연대도, 그 투쟁을 함께 포기한 수인과의 연대도 실패한다. 유일한 예외는 아파트 가격을 방어하기 위한 입주민들의 연대다. 여기에 이 영화의 서사적 딜레마가 있다. 외부로 투사할 수 있는 확실한 적대만이 연대를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쩌면 연대와 함께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저항의 이미지가 오히려 섣부른 화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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