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품고 있는 리듬을 담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공간과 그 안의 사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물질성과 운동이 자아내는 리듬이 하나의 세계를 이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세상의 리듬을 영화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선 도쿄에 자리한 아담한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리듬을 형성하고, 전철의 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의 순환하는 리듬을 일깨우며, 도심지의 소음과 작은 동네의 고요함이 개별적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깊고 단단하며 신비롭다. 이 영화엔 사사롭지만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주인공 게이코(기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들이 느슨하게 들어찬다. 영화는 복싱 선수 게이코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게이코의 삶과, 그녀와 이어진 인물들과 그들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들까지 모든 풍경들을 세심하고 평등하게 다룬다. 이 영화의 비상한 자질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선 누구라도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체육관에서 게이코와 마쓰모토(마쓰우라 신이치로)가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때다. 이 장면은 회장 부인(센도 노부코)의 내레이션으로 게이코의 일기를 낭독할 때 나오는데, 게이코와 마쓰모토의 안무와 같은 훈련은 리드미컬하게 맞아떨어지며 쾌감을 안긴다. 둘도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기뻐하는데 이 운동이 일으키는 리듬은 아름답다.
그런데 두 신체가 일궈내는 운동의 리듬만큼이나 아름다운 운동이 있다. 체육관 창가에 해가 비치고 먼지가 날리는 모습을 찍은 인서트다. 먼지의 운동이 만들어낸 고요한 리듬은 게이코와 마쓰모토가 만든 리듬과는 또 다르게 빛난다. 영화는 다른 속도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개별 존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응시한다. 간혹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도 보인다. 그 장소, 그 시간에 일어나는 운동과 그것의 리듬을 기록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점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힘의 근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계 안에서 게이코는 살아간다.
몸의 언어를 들리게 만들다영화에서 게이코가 첫 경기에서 승리한 후 이뤄지는 인터뷰에서 기자는 체육관 회장(미우라 도모카즈)에게 “오가와 선수가 프로가 될 수 있었던 건 재능과 소질이 있어서였던 건가요?”라고 묻는다. 청각장애가 있음에도 장애를 넘어설 만큼의 재능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리라. 그러자 회장은 “재능은… 없어요.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요.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라고 신중히 답한다. ‘인간적인 기량’이 좋은 복서가 되는 데 얼마큼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이 말은 멋있다. 하지만 그 멋스러움에 감동이 이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게이코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기량을 투명하게 내비치기 때문이다. 알려졌다시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오가사와라 게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가사와라의 생을 재현하지 않았으며, 많은 부분이 픽션이다. 말하자면 게이코란 사람을 왜곡하지는 않되 그가 가지는 관계들은 창조한 것이다. 장소와 주변 인물과 그날그날의 훈련과 지나친 풍경과 빛을 달리하면서 말이다.
게이코가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엇보다 육체를 통해서다. 청각장애가 있는 그녀는 사람의 입모양으로 언어를 알아차리거나 수어나 문자로 소통한다. 훈련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히면서 트레이너와 함께 동작을 연마해간다. 그녀가 훈련하는 모습에선 운동성과 음악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마쓰모토와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을 하는 장면은 하나같이 안무처럼 유연한 데다 마찰음이 리드미컬해 어떤 음악성이 담겨 있고, 회장과 함께하는 섀도복싱에선 두 인물이 나누는 육체의 대화가 친밀하게 들려오는 듯도 싶다. 영화는 게이코가 가까이 여기는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친밀하게 소통하는지 그 동그란 눈으로 대상을 들여다보며 온몸으로 함께 전율하는지 세심히 응시한다. 그러한 응시는 게이코가 동생 세이지(사토 히미)와 소통할 때에도, 낯선 이들과 스쳐 갈 때에도 지속된다.
흥미로운 점은 게이코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 따라서 카메라의 거리감도 온도도 딱 그만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흥미로울 점인가 싶겠지만 사건을 키우지는 않되 게이코가 일상에서 부닥칠 수 있는 일들이 영화에서는 소소하게 일어나고 영화는 그 상황을 더없이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예컨대 게이코가 편의점에서 점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본의 아니게 점원을 무시하게 된 때에도 점원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상황을 넘기고, 게이코가 계단에서 부딪친 남자가 아무리 뒤에서 욕을 해본들 게이코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게이코가 밤의 강변에서 어슬렁거릴 때 다가오는 경찰들은 최소한의 임무만 마친 후 돌아간다. 게이코에게 이들은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다. 영화는 이 바람도 담는다. 이것이 게이코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게이코가 이들에게 갖는 거리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담고 흔적은 확실히 남긴다.
일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시간이 품은 리듬을 담는 동시에 그 리듬이 바뀌어 갈 미래를 예견한다. 영화 시작부에 체육관이 등장하기 전,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작은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때 줄넘기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고 이내 줄넘기 소리는 샌드백을 치는 소리와 미트 훈련하는 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인물들이 훈련하는 소리는 체육관의 일상을 보지 않아도 보이게 만드는 일상의 리듬을 형성했다. 소리만 들어도 어떤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지 체육관에 얼마큼의 사람이 훈련하고 있는지 가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리듬은 체육관이 폐관하면서 사라진다. 게이코에겐 일상의 리듬을 이루던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경기에서 패한 것보다 이 상실감이 그에겐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상실감에 젖어 있기엔 그녀의 몸은 아직 가볍다. 그는 강변 위로 올라 걸음을 옮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미야케 쇼의 청춘영화의 계보 안에 그냥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영화는 그의 영화가 무언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동시에 거장들의 이름을 상기시킨다. 이미 많은 평자들이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을 말했다. 나 역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보며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떠올렸고,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앞서 거론한 감독과 더불어 허우샤오시엔을 다시 떠올렸다. 다만 특정 영화라기보단 카메라 위치와 응시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의 세계가 점점 우리의 언어가 닿지 않는 곳, 언어로 풀기 어려운 깊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