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회 칸영화제가 열이틀 동안의 여정을 접고, 지난 5월26일 막을 내렸다. 올해는 유난히 화려하고 알찬 영화들이 매일 밤 그 위용을 뽐냈다. 거장감독들과 스타배우들이 즈려 밟은 레드카펫은, 충심으로 그들을 경애하는 시네필들에겐 매직카펫에 다름 아니었다. 경연대회의 긴장감보다는 축제의 흥분으로 들떴던 올 칸영화제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 황금종려상을 안기고, 로만 폴란스키의 거장 귀환을 축하하는 것으로 마감했다.
프랑스 대선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채 막을 올린 올 칸영화제의 화두는 역시 ‘정치와 사회’였다. 그것은 여전히 영화가 세상과 소통하려 하고 있다는 희망. 다시 쓰는 현대사, 다른 각도에서 보는 오늘의 정세 등을, 올해 칸을 찾은 감독들은 즐겨 이야기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장과 신예를 불문하고, 미학적인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는 반가운 증거와도 만날 수 있었다. 거장들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신예들이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인, 경이로운 순간들.
<씨네21>은 열이틀에 걸친 칸영화제 참관 기록과 올해 칸의 선택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담았다. 영화제 기간 동안 초인적인 힘을 발휘, 60편에 가까운 영화를 섭렵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세 번째 편지를 함께 싣는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린치가 이끈 심사위원단의 카드는 뜻밖이었다. 영화제 후반부에 상영돼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언론과 평단이 시큰둥하게 반응한 로만 폴란스키의 홀로코스트 서사극 <피아니스트>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가 나치로부터 생존한 실화를 소재로, 폴란스키의 모국인 폴란드의 어두운 과거를 되짚은 영화. 특별히 흠을 잡긴 어려운 ‘웰 메이드 무비’지만, 반면 진일보한 주제의식이나 형식미를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전형적인 휴먼드라마다. 오히려 작품의 면모보다는 감독 본인의 고통스런 과거에 대한 ‘살풀이’로서의 의미에 주목할 만했다. 일반 시사회장에서 많은 관객을 울게 만든, 그러나 칸보다는 오스카에 어울릴 법한 영화. 영화제 기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의 리뷰를 쓴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조차 “올 경쟁부문 작품 중에서 가장 진부한 영화로,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다룬 기존의 영화보다 진정성과 통찰력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다”고 평했다.
비교적 막강한 후보가 버티고 있던 남녀 연기상은 모두 의외의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남우주연상은 다르덴 형제가 연출한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가 수상했다. 당초 남우주연상으로 물망에 올랐던 배우는 <스위트 16>의 마틴 컴스턴과 <슈미트에 관하여>의 잭 니콜슨. 특히 처음 영화에 출연한 축구선수 마틴 컴스턴은 불우한 환경을 돌파하려고 안간힘 쓰는 영민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의 희망과 좌절을 생생하게 체현해내 그야말로 ‘충격’을 안겼다. 또한 뚜껑을 열기 전까지, 여우주연상 후보로는 <스파이더>에서 1인3역을 소화한 미란다 리처드슨이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단은 어떤 이유에선지 카우리스마키의 단짝 카티 우티넨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영국은 불만, 미국은 만족
수상결과를 놓고 보면, 라인업에서 수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나라들이 예상 외로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비롯한 4인의 감독을 진출시켰지만, 단 하나의 상도 가져가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수상결과에 대해 딴죽 걸지 않는 분위기다. 반면 국가대표 감독 3인을 진출시키고 기대에 들떴던 영국 언론은 실망스런 결과에 잔뜩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는 “마이크 리의 <전부 아니면 전무>와 마이클 윈터보텀의 은 완전히 아웃사이더였다”며 분개했다. 남녀 연기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마틴 컴스턴과 미란다 리처드슨도 모두 영국 배우들이고 보니, 아쉬움이 더한 것이다. 미국은 <슈미트에 관하여>를 제외한 다른 2편의 진출작 <펀치 드렁크 러브>와 <볼링 포 콜럼바인>이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둬 자족하는 분위기다. 동아시아권은 올해 전례없는 부진을 보여 한국과 중국만 참석했는데, 영화제쪽이 마지막 순간까지 연막 작전을 펼치다가 중국 정부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모셔온’ 지아장커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들이다.
황금종려상, 유대인의 심기를 위로하려는 배려?
매해 시상식이 끝나면 각국 언론이 심사위원장을 도마 위에 올리곤 하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리베라시옹>이 “모두를 위한 황금종려상”이라고 알쏭달쏭하게 눙친 것이 그중 한 예다. 올 프랑스 대선 당시 칸의 르펜(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이민족차별정책을 내세운 극우주의자) 지지율이 유난히 높았던 데 대한 충격과 실망으로 유대계 미국인 단체에서 미국 영화인들의 칸영화제 보이콧을 종용했던 사실이 있다. 물론 칸영화제를 (감히) 보이콧한 미국 영화인은 없었다. 그들을 대표하는 자리에 선 데이비드 린치의 결단은,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신임을 잃은 영화도시 칸의 결단은, 결국 유대인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얘기다. <가디언>은 그에 대해 “이번 심사결과는 일종의 회유책”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는 현지 평단에서 열광했던 팔레스타인영화가 4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는 데 그친 사실과도 아귀가 맞는다. 한편에서는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외면당한 것은, 지난 99년 각각 심사위원장과 경쟁자(결국 우승자)였던 그들에 대한 데이비드 린치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됐기 때문이라는 억측(?)까지 나오고 있다.
전례없이 화려한 라인업 속에서 수상 가능성과는 별도로 크로와제트 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품들이 있다. 아르메니아 혈통의 감독 아톰 에고이얀은 과거 터키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그린 <아라라트>를 ‘굳이’ 비경쟁 부문에서 상영했다. <아라라트>는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된 작품으로, <리베라시옹>은 개막 이전에 이미 <아라라트>의 특집 기사를 싣기도 했다. 또 크로넨버그는 올 경쟁부문 스타감독 군단 안에서도 유난한 인기를 누린 감독이다. <스파이더>의 기자시사장 밖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똬리를 틀었고, 기자회견장도 취재진으로 가득 들어찼다. <스파이더>는 신체해부학적 이미지로 들어찬 호러로 특징지워지는 전작들과 결별하다시피한 심리극으로, 시사 직후 ‘언뷰티풀 마인드’로 불리기도 했다. 평단은 반응은 크게 엇갈렸는데, <포지티프>와 <프리미어>가 최고점을 준 반면, <뤼마니테>와 <르 파리지앵>은 최하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
가스파르 노에의 <되돌이킬 수 없는>은 영화제 후반부를 강타한 최고의 스캔들. 강간과 응징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작품의 심야 공식시사장에서는 250명이 뛰쳐나가고 그중 20명이 기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평단도 호의적이지 않아서, <르 몽드>는 감독을 “탁상공론만 하는 게으른 철학도”에 비유했고, 는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는 모토에서 이 영화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게 다행스럽다”는 악담을 퍼부었다. 다만 <뉴욕 타임스>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구성은 철저하게 망가진 삶이 애초엔 달콤한 약속과 희망들로 가득했다는 것을 잔인하고도 시니컬하게 보여준다”며 두둔했다. 그러나 이런 스캔들이 영화에 해로울 것 같지는 않다.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칸영화제에서의 논쟁이 50만에서 100만유로의 광고효과를 낸다고 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해외 판매실적은 꽤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라인업
전반적으로 올해 출품작들은 시네필들을 황홀경에 빠뜨릴 만했다. 거장은 건재했고, 영화는 세상과 소통하려 했고, 실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 장 뤽 고다르, 켄 로치, 로만 폴란스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이크 리, 알렉산더 소쿠로프, 아모스 기타이가 한꺼번에 신작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르 몽드>의 지적처럼, 다들 “미학적으로나 주제면에서 영화의 힘을 증명”해 보였다. 디지털 실험으로 정의할 수 있을 미학적 성과 중에서 소쿠로프의 원테이크 디지털 촬영은 단연 발군이다. 예술공헌상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단연 그의 몫이었을 것이다. 소쿠로프는 HD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90분 동안 원테이크로 영화를 찍었다. 영화적인 시간, 그리고 편집의 개념을 지운 진기한 영상실험. 한편 키아로스타미는 자동차 운전석 아니면 조수석, 딱 2가지 앵글로 10시퀀스짜리 영화 을 찍었다. 그는 촬영과정에서, 영화 속에서 ‘연출자’의 자리를 지워버리려는 대담무쌍한 시도까지 겸했다. 다르덴 형제와 지아장커도 숏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보였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정치·사회적 이슈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신의 간섭>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오늘을 담아냈다면, <케드마>는 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건국사를 이야기했다. 폴란스키는 2차대전 당시의 폴란드로, 에고이얀은 오토만제국 시절의 터키로 거슬러올라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 하나 특징적인 우연은 남성들의 자아발견 또는 파멸의 스토리가 유난히 많았다는 것. <펀치 드렁크 러브> <슈미트에 관하여> <과거없는 남자> <적> <스파이더> <아들>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 이 밖에 영화 속에서 음악의 쓰임새가 커진 것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은 아예 70년대 맨체스터 클럽문화와 레코드 산업을 다뤘고, <펀치 드렁크 러브> <신의 간섭> <과거없는 남자>는 뮤지컬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적절하게 음악을 내러티브에 녹여 담았다.
고매한 예술과 속보이는 상술의 공존
그렇다고 열이틀 동안 고매한 예술의 경연대회만 열린 것은 아니다. 반대편에선 영화제의 후광을 등에 업은 거대 마켓이 열렸고, 슈퍼스타를 동원한 할리우드 대작의 홍보 이벤트가 펼쳐졌다. 스타가 있고 돈이 있는 곳으로 이목이 쏠리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그 불균형의 정도가 심해서 때때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주곤 했다. 시네파운데이션 심사위원장으로 초대된 마틴 스코시즈는 크리스마스 개봉 예정인 <갱스 오브 뉴욕>의 20분짜리 프로모 상영 이벤트에도 ‘겹치기 출연’했다. 주연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카메론 디아즈,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까지 총출동한 이 이벤트는 (확신하건대) 영화제 기간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인파를 몰고 다녔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의 특별상영을 위해, 피어스 브로스넌은 20번째 의 홍보를 위해 칸을 찾았다. 영화제 출품작을 비롯, 영화를 사고 파는 마켓에는 전세계 70개국에서 7천명이 참가해 2천편에 달하는 ‘매물’을 살폈다. 칸영화제의 또 다른 존재 이유.
“영화와 관련된 것이면 예술, 비즈니스, 마켓, B급영화, 스타 시스템 등 모든 부문을 총동원함으로써, 영화제의 전방향을 확장했다”는 것이 올해 칸영화제에 대한 <르 몽드>의 인상이다. 이처럼 현지 언론은 칸이 외양과 내실면에서 ‘세계 최고의 영화제’라는 이름값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올 칸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라인업, 그리고 그보다 더 화려한 ‘비공식’ 행사들로 이국의 취재단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고매한 예술과 속보이는 상술의 아이로니컬한 공존 또는 공생. 칸 비치의 해는 그렇게 뜨고 졌다.칸=글 박은영 cinepark@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 ● ● 수상결과
황금종려상:<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폴란드)
심사위원대상: <과거없는 남자> 아키 카우리스마키(핀란드)
감독상: <취화선> 임권택(한국) / <펀치 드렁크 러브> 폴 토머스 앤더슨(미국)
심사위원상: <신의 간섭> 엘리아 술레이만(팔레스타인)
시나리오상: <스위트 식스틴> 폴 레버티(영국)
남우주연상: 올리비에 구르메 <아들>(벨기에)
여우주연상: 카티 우티넨 <과거없는 남자>(핀란드)
55주년상: <볼링 포 컬럼바인> 마이클 무어(미국)
황금카메라상: <바닷가> 줄리 로페즈 커벌(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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