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도경(전석호)의 비보는 어느 날 갑작스레 날아들었다. 도경이 세상을 떠난 뒤, 명지(박하선)는 그의 흔적이 가득한 집을 벗어나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향한다. 그곳에서 대학 동창 현석(김남희)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는다. 현석에게 도경의 죽음을 전하는 대신 명지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듯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설행_눈길을 걷다> <프랑스여자> 등을 연출한 김희정 감독의 신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남겨진 이들의 생을 묘사한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이 원작이지만 영화화되면서 도경이 선생으로 있던 학교의 학생들, 지용(김정철)과 해수(문우진), 지용의 누나 지은(정민주)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배우 박하선은 건조한 낯빛으로 도경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는 명지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린다. 지난 5월, 폐막작으로 선정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박하선은 뜨겁게 햇빛이 내리쬐는 7월의 여름, 스크린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마주할 준비를 마쳤다.
- 김희정 감독의 전작을 재밌게 봤다고.
= <프랑스여자>에서 여성 캐릭터를 솔직하고 가감 없이 그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 있어 정말로 연락이 왔다. 감독님 이름을 확인하곤 대본을 보기도 전에 하겠다고 했다. (웃음) 그만큼 믿음이 있었으니까. 원작을 본 뒤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 원작 소설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던데. 시나리오에선 지용, 지은, 해수 등 아이들의 이야기가 추가됐는데 그러한 변화는 어떻게 봤나.
= <바깥은 여름>으로 김애란 작가를 처음 알았는데 그의 다른 작품을 다 찾아 읽을 정도로 팬이 됐다. 첫 챕터부터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이었다. 말한 대로 시나리오에서 바뀌고 추가된 부분들이 있지만, 다행히 원작의 감성은 훼손되지 않고 잘 유지됐다고 느꼈다.
- 도경이 떠난 뒤 명지는 실내에서 누운 채 등장할 때가 많다. 상기해보면 이만큼 건조한 낯빛의 박하선 배우를 전작들에선 거의 본 적이 없었다.
= 도경이 죽은 지 4개월 정도 됐다고 했으니 감정을 크게 드러내며 슬퍼할 시기는 지났을 것 같았다. 나도 예전엔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누군가에게 달려가 털어놓곤 했다. 그런데 그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더라. 시간을 갖고 내 안에서 해답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게 나을 때가 많았다. 어쩌면 명지도 그랬던 게 아닐까. 자꾸만 잠으로 도피하는 건 눈앞의 현실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결하곤 해서 명지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쩌면 실제의 내가 캐릭터에 자연스레 반영됐는지도 모르겠다.
- 5kg을 감량한 건 감독의 요청이었나.
= 그렇진 않았는데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잘 먹고 있어요.” “살 안 빠졌어요. 그대로예요.” 시어머니가 반찬을 계속 보내주시는데 명지가 입맛을 잃은 상태라 냉장고에 음식이 쌓여만 간다. 상황이 이러하고, 중간중간 명지의 등이나 배가 드러나는 장면도 있어 마른 게 잘 보이면 좋을 것 같았다. 회상 신에서 남편과 같이 있을 때나 오랜만에 현석을 만난 장면을 제외하곤 메이크업 베이스조차 바르지 않았다. 로션을 바르면 피부가 반짝이길래 로션도 안 발랐다. 메이크업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조명을 배우에게 맞출 수 있어서 시도해봤다. 후반작업 때 잘 다듬어주신 것 같은데 원래는 말라서 볼이 팬 얼굴이나 다크서클 같은 것들이 더 눈에 띄었다.
- 명지는 폴란드에서 만난 현석에겐 도경의 죽음을 전하지 않는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버거워 보였다.
= 결혼 전엔 혼자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럴 때면 옛 초등학교 동창이나 현지에 있는 한국인 지인을 꼭 찾아갔다. 여행지에서 오랜만에 보면 굉장히 설레고 반갑다. 그런 감상과 상반되는, 헤어진 남편에 관한 힘든 마음을 명지가 계속 숨기고 싶을 거라 생각했다. 도경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는 현석을 괜히 만났나 생각했을 거고. 희한하게 폴란드에서 촬영할 때 전석호 선배가 그렇게 보고 싶더라.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 마음이 사라지긴 했는데. (웃음) 그때 생각했다. 명지도 도경이 정말 보고 싶었겠구나. 여행 가서 보고 싶은 사람이 제일 그리운 사람이라더라.
- 시리(애플의 음성인식 인공지능 비서)와 대화할 때 명지의 외로움과 고민이 더 솔직하게 드러난다. 독백에 가까운 장면이라 촬영 시엔 오히려 까다롭지 않았을까 싶었다.
=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시리와 대화하는 신을 이미 찍어봐서인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현장에서도 조감독님이 시리의 대사를 불러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더 어색해서 그냥 혼자 했다. 되돌아보면 항상 문학과 관련된 캐릭터를 많이 맡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도, <혼술남녀>에서도 국어 선생님이었고 명지도 문학을 전공한 책방 주인이다. 그래서 문어체 대사를 던지는 것에 익숙하지만, 명지의 질문들이 워낙 철학적이라 좀더 자연스럽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 이번 작품에서 긴 대화 신이 유독 많다. 찍을 때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이 있나.
= 폴란드에서 현석과의 대화 신이 굉장히 길다. 대본이 A4 두장을 넘길 정도였으니까. 공원에서, 그리고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할 때 텐션을 떨어트리지 않고 재밌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감독님과 연구했다. 하지 않은 선택에 관해 현석과 의견을 나누는 신도 워낙 밀도가 높아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대화 신은 아니지만 후반부에서 편지를 읽는 장면도 주요하게 여겼다. 책을 읽을 때, 시나리오를 읽을 때 항상 그 부분에서 눈물이 터져서 현장에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을까봐 최대한 연습을 하지 않았다.
- 바르샤바 봉기 추모일에 맞춰 촬영한 장면은 어땠나. 시기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8월에 폴란드로 떠났다고.
= 폴란드가 익숙하지 않은 나라라 주변에서도 그렇고 나도 기대가 컸다. 도착해서 보니 도시가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당시의 봉기를 기억하기 위해 건물의 총탄 자국 같은 걸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봉기일에 짧게는 1분, 길게는 5분 정도 사이렌이 울리는데, 짧은 순간에 정확하게 촬영을 마쳐야 했다. 그때 명지의 바스트숏을 찍었는데 사실 울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멀리서 붉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클랙슨을 울리거나 밖에 나와 추모하는 광경을 보니 자연스레 눈물이 나더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리 영화가 그 장면을 보고 달려온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잘 담겨서 정말 다행이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것 같나.
=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죽을힘을 다해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그러다 한번 크게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 복기해보니 내가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더라. 잘하려고 끝없이 반복하다보니 대사나 표정 등이 오히려 작위적으로 표현된 감이 있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힘을 덜어내는 식으로 연기 톤을 바꿔 찍은 첫 작품이다. 스스로도 새로웠고, 앞으로도 아마 이렇게 가지 않을까 싶다.
- 2020년부터 라디오 <박하선의 씨네타운>을 시작해 햇수로 벌써 3년차다. 배우는 인터뷰이로 자리할 때가 많은데, 라디오를 하면서 진행자이자 인터뷰어의 위치에서 상대방과 만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 꼭 소개팅하는 것 같다. (웃음) 처음 보는 감독님과 배우들이 종종 게스트로 찾아오는데 이 만남을 기점으로 좋은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작품에서 느꼈던 이미지와 다른 인상을 받을 때도 흥미롭고. 내가 영화를 거절했거나 감독님이 나를 거절했을 때 등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오해도 풀 수 있다. 가능한 한 대화를 나눌 때 예민한 질문은 다 빼고 온전히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테면 배우자, 아이들, 열애설 같은 건 제외하고 말하는 거다. 그리고 ‘오늘 편하셨으면 다음에 또 나와 달라’라고 인사하며 헤어진다. (웃음) 개인적으로 한국영화를 참 많이 좋아했는데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해외영화도 많이 보게 됐다. 영화 관련 지식이 많아진 것도 장점이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라도 그냥 이 일이 정말 재밌다. 작품 촬영 때문에 몰아서 녹음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죄송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다.
- 예정된 차기작이 있나.
= 연극이 있는데 어떤 작품인지 아직 밝힐 수 없어 아쉽다. 20대 초에 연극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에 큰 에너지를 받았고,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에 신구 선생님의 연극을 관람했는데 힘을 빼고 연기하시는 게 깊이 와닿더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연기하고 싶었다. 예전에 내가 연기하던 방식과 지금 새롭게 찾아낸 방식을 융합할 수 있는 게 연극이라 생각한다. 연극의 텍스트를 깊게 파고들되 영화에서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해보려 한다.
- 데뷔 20년차가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느끼나보다.
= 답을 찾았다고, 이젠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만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려 한다. 2년 가까이 작품을 쉬었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완화된 후로는 여행도 많이 다녔다. 많이 놀고 잘 쉬고 육아도 했으니 이제는 연기에 전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