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비밀의 언덕’, 나를 키운 비밀과 거짓말, 부끄러움
2023-07-12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1996년, 초등학교 5학년 명은(문승아)의 콤플렉스는 자신의 부모이다. 그들이 시장에서 젓갈을 판다는 사실뿐 아니라 세상살이에 닳고 닳은 저속하고 투박한 언행이 명은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명은은 담임 선생(임선우)과 가정환경 조사 면담을 하다 자신의 부모를 회사원과 가정주부라고 거짓말한다. 한편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똑 부러진 품행을 강점으로 반장에 당선된 명은은 자신의 공약대로 교실에 비밀 우체통을 설치해 친구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때론 친구간의 문제를 중재하며 학급을 효율적으로 운영해간다.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 그런 명은을 신뢰한다. 그러나 남들 앞의 자신과 진짜 자신 사이의 미묘한 간극으로 인한 불편함이 조금씩 커져갈 즈음, 명은의 반에 쌍둥이 자매 혜진(장재희)이 전학을 온다. 자신과 달리 매사 솔직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혜진 자매를 보며 명은은 생경하고도 꺼림직한 기분을 느낀다. 혜진은 명은의 특기인 글짓기 영역에서마저 위협을 해온다.

열두살 소녀의 저릿한 치부와 속사정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 영화 <비밀의 언덕>은 10대의 순진무구하거나 무해한 속성보다는 서늘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면모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가족이라는 폐쇄적이고 절대적인 세계에서 학교와 같은 외부 세계로 삶의 반경을 넓혔을 때 마주하게 되는 모종의 깨달음과 이에 수반되는 수치감 같은 것들이 소녀의 마음에 혼란스러운 열꽃을 피운다. 영화는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가정환경 조사서에 부모의 학력과 직업, 가정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를 적어내던 시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세속적 가치 앞에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포장지로 자신을 서투르게 보호하려 했던 명은의 불안정한 마음을 들여다본다.

거짓말이 낳은 또 다른 거짓말의 연쇄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명은의 일상에 혜진이라는 전학생의 등장은 파문과 균열을 일으킨다. 거짓이나 꾸밈, 포장이나 과장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혜진은 명은에게 뜻밖의 충격을 안긴다. 혜진의 솔직함은 글짓기 분야에서 최고의 무기가 되고, 이는 글짓기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해온 명은에게 자신의 글을, 나아가 자신의 (무기였던) 비밀과 거짓말을 돌아보게끔 하는 계기가 된다. 솔직할 것인가, 솔직해야 하는가, 솔직한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인가. 어른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를 두고 영화는 명확한 답을 내리는 대신 명은이 마침내 ‘비밀의 언덕’에 당도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렇게 영화는 열두살을 열세살로, 나아가 스무살로 자라게 만든 불안하고 미숙한 감정 속 성장의 원동력을 발견한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이다.

할머니,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예요.

돌아가신 할머니를 핑계 삼아 부모에 대한 거짓말을 해온 명은이 거짓 없는 솔직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뒤 할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이어지는 편지글에는 가족에 대한 명은의 진솔한 생각이 담겨 있다.

CHECK POINT

<미드90> 감독 조나 힐, 2018

1990년대 중반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두 영화 <비밀의 언덕>의 명은과 <미드90>의 스티비는 많은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 가정 내에서 해결되지 않는 모종의 성장통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조응한다. 쉼 없이 부딪히고 깨지고 도망치고 부서지는, 위태로운 그 시절 명은에게 글짓기가 있다면, 스티비에겐 스케이트보드가 있다는 점 또한 비교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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