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낭만화되기 십상이다. 한국영화 속 풍경으로 국한하면, 폭력은 학창 시절의 추억(<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이고, 상처 입은 가여운 영혼의 초상(<아저씨>)이며, 최근 사례로는 능청스러움이나 가벼운 농담과 동일한 값을 지닌다(<범죄도시> 시리즈). 추억과 놀이, 심지어 향수와 애상마저 포괄하는 낭만화한 폭력에 반성이나 통찰 따위는 희미하다. 다르게 말하면 폭력은 주어진 질서 안에서 태생하는 동시에 이 질서를 영속시키는 수단이다. 생각해보라. 농담처럼 가볍고 통쾌한 <범죄도시> 시리즈 속 마석도(마동석)의 펀치가 범죄자를 때려눕혀도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참혹한 복수에 나서는 특수부대 출신의 인간 병기는 흠모의 대상이 되고, 학교 폭력 가해자는 우상이 된다. 폭력의 낭만화와 관련해 사회는 분명 개인과 공모 관계에 있다.
오로지 개인만이 낭만화하는 폭력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쓰임도 낭만화 관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조직폭력배 두목 정도의 형상으로 모아질 법한 인물이 정초한 사지절단과 낭자한 피, 처형에 가까운 폭력 이미지는 그 파괴력을 감정적 동화의 재료로 삼는다. 그럼에도 감독의 작품 속에서 개인이 낭만화한 폭력은 통념과 달리 사회와 반드시 공모 관계에 있다고 보기 힘든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이 공모를 해체하고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거창한 의지와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권력과 정치,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의 움직임에 관심을 둔다고 자주 밝혔지만 끝내 관객의 뇌리에 남는 건 낭만과 등치인 캐릭터의 성정과 비록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아니더라도 그 캐릭터가 수행하는 파괴적 폭력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그가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의 살인마(최민식)와 <부당거래>의 최철기(황정민)나 주양(류승범)을 포함해 <신세계>의 이자성(이정재), <마녀> 시리즈의 자윤(김다미), <낙원의 밤>의 태구(엄태구) 등 인물 대부분은 자기 안위를 도모하는 게 지상 과제이고, 그 과정은 어김없이 폭력을 수반하는데, 이들이 폭력으로 매혹한다 해도 관객이 불시에 학습하는 사회질서의 존재를 단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름의 질서를 내재한 조직을 재현하지만 그건 파괴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협하고, 점령하지 않으면 그들을 이용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다. 요컨대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낭만화는 극히 사적인 층위에서 이뤄지며, 권력과 정치를 품은 사회의 존재는 공모 관계에 따라 의도를 지니고 배경으로만 기능하거나 개인이 집행하는 폭력의 낭만화 공작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사회와 공모하지 않은 개인이 낭만화한 폭력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개인이 폭력을 휘두르고 사회는 눈감아주던, 시쳇말로 이권 카르텔에 언젠가부터 균열이 생긴다. 이제 사회는 질서의 정체를 은폐하고 승인해주는 폭력을 취사 선별해 무마하고 나머지는 방기한다.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퇴보가 병행하면서 많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스스로를 건사하지 못하면 노력과 인내의 부족을 탓하는 담론이 등장한 것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과정이다. 각자도생으로 요약되는 이같은 양상이 영화 속 인물에게도 투영된 것일까. 집단이 버린 개인이 믿을 구석은 이제 자기 자신밖에 없다. 또 자기를 채근하는 개인이 다다를 두 극단은 우울과 나르시시즘이다. 공교롭고 흥미롭게도 박훈정 감독의 가장 최신작 <귀공자>에서 관객이 목격한 건 자기애가 끝 간 데 없이 나아간 나르시시즘의 화신 귀공자(김선호)다. 명칭부터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그는 개인이 벌이는 폭력에 심취해 있다.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머리는 손질했으며, 격렬한 움직임 뒤에 거울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점검한다. 귀공자의 행보가 기괴해 보일지 모르지만 무대 위에서 나르시시즘을 외치는 아이돌이 인기를 얻는 현실을 보더라도 귀공자처럼 자기애로 현재를 견디는 인물을 이미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접한다. 따라서 정통 장르를 토착화했다거나 장르에 약간의 변주를 가미했다는 설명이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낭만화한 폭력의 성질을 온전히 가리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그의 작품에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면이 있다면 이유는 이렇지 않을까. 바로 오로지 개인만이 낭만화를 추구하는 폭력이라는 것. 필모그래피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지면서 결국 <귀공자>에 이르러 등장한 귀공자는 홀로 폭력을 낭만화하는 개인의 완성형이라 할 법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덧붙여 한번쯤은 꼭 짚어볼 필요를 느낀, 그의 작품에서 반복해 발견할 수 있는 경계 바깥의 요소를 적극 끌어들이는 작업을 말하고 싶다. 또 그건 유독 출신과 언어로 재현한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신세계>는 중국 동포와 중국어를, <브이아이피>는 탈북한 살인마나 CIA 요원(페테르 스토르마레)과 그들의 언어를, <마녀> 시리즈는 다양한 국적의 인물과 그들의 모국어를, <귀공자>는 전면에 내세운 한국-필리핀 혼혈인과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를 빈번히 부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같은 외래 요인들은 소속 또는 출신과 관련한 편견과 동경이라는, 사회질서를 승인하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보다 편견과 동경의 현상을 그대로 가져다 개인이 수행하는 폭력의 낭만화를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여기서 솔직한 심정으로 아직 이 문제의 실체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차선으로 오래된 논의를 빌리려 한다. ‘두사부일체’나 ‘국부’ 등의 용어에서 보듯 특정 지위와 실체 없는 공동체를 쉬이 아버지로 상정하는 한국 특유의 가부장적 정서와 프로이트식 화법을 엮어 말하자면, 공모라는 부자 관계에서 진정한 성장을 위해 친부, 즉 사회는 개인에게 상징적 영역에서 살해됐어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자취를 감춰버린 형국이다. 당황한 개인은 친부를 혐오하든 동경하든 어쨌든 그의 빈자리를 무엇으로든 대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외래 요소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외국인과 외국어의 부각은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한 탓에 불안정해진 개인의 정서가 폭력을 낭만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외부로 드러난 표현형일 수 있다. 때마침 <귀공자>에서 마르코(강태주)가 타인을 친부로 오인한다는 설정은 우연치고 감독의 작품 세계를 자기 지시하는 것에 가까워 공교롭기도 하다. <혈투>와 <대호>는 동일한 맥락에서 부재한 친부를 찾으려 친부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본 일로 간주할 수 있고, 다른 작품에 비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사연도 얼마간 수긍이 간다.
<귀공자>를 보면서 한 가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마르코의 친부와 배다른 형은 마르코의 심장을 친부에게 이식할 때 아무리 직계존속의 장기라도 면역 반응을 일으킬 걱정이 안됐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수술만 한다면 만사형통이라는 듯이 군다. 마찬가지로 박훈정의 작품은 친부 자리에 타자를 데려다놓는 일의 영향력 안에서 개인이 낭만화한 폭력이란 사정에 관객이 보일 면역반응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알겠지만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다른 누군가는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