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광’이라는 이랑 감독의 노트에는 영화의 신, 캐릭터 설정에 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기자의 질문에 틈틈이 메모를 살피고 보여주며 답을 이어나갔다. 그의 신작 <잘 봤다는 말 대신>은 독립예술영화 활성화를 위해 인디그라운드에서 마련한 ‘인디플렉스’ 캠페인 시즌4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편영화다.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독립영화감독 김새벽과 공민정은 ‘영화 잘 봤다’는 상투적인 평을 대신할 적절한 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으나 이랑 감독은 영상과 글, 그림과 음악을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로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 뒤 “이제 영화를 찍을 때”라고 느꼈다는 그에게 대화를 청했다.
- 캠페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영화를 찍기 어려워 웹드라마 연출을 주로 했다. 그 밖에 예술 분야에서 입지를 잘 다지고 싶은 마음에 음악 활동에 주력했다. 지난해에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하고 나니 ‘그동안 나 정말 열심히 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동시에 이제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에게 이러한 의지를 전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편 하나 먼저 연출해보면 어떻겠냐” (진명현 대표)며 인디그라운드와 연결해줬다.
- 김새벽 감독이 자전거로 언덕길을 오르며 영화가 시작된다. 에무시네마를 자주 다녀본 사람이 구상할 수 있는 오프닝이라 생각했다.
= 에무시네마는 인디그라운드에서 제안을 해준 것인데 나 역시 그곳에서 영화를 보고, 야외 무대에서 공연도 한 적이 있다. 김새벽 배우가 요즘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있다고 진명현 대표가 귀띔해준 게 오프닝 시퀀스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됐다. (웃음)
- 인물에 배우들의 이름을 그대로 부여했다. 배우들의 실제 면면도 반영했나.
= 어느 정도는 그렇다. 만나보니 두 배우 모두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다. 새벽 배우는 <벌새>에서의 느낌이 있었는데 <퀸메이커>를 본 뒤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공민정 배우는 전작들을 보며 통통 튀면서도 상대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역할을 잘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론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이 있다. 작업 방식도 달랐는데 가령 새벽 배우는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펼치고, 민정 배우는 사전에 잡아놓은 톤으로 쭉 끌고 간다. 한명은 톤이 정확히 잡혀 있고 다른 한명은 디렉팅을 줄 때마다 확확 바뀌니 현장에서도 재밌었고, 편집할 때도 정말 즐거웠다.
- 일상에서의 재밌는 대사를 적어뒀다 활용하는 편이라던데 이번 작품에선 어떤 대사가 그러했나.
= ‘잘 봤다’, ‘어디를 잘 봤냐’, ‘처음부터 중간, 마지막까지’와 같은 대사들. 배우들과 리딩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원래는 두 사람이 독립영화 배우라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주로 연출자들이 이러지 않냐”는 거다. 설명하기를 연출자들은 몇년에 한 작품 내놓기도 힘드니 관객의 반응에 예민해지는데 배우들은 1년에 5편 이상 하기도 해서 한 작품의 결과에 상대적으로 데미지가 적다고 했다. 그 말이 힌트가 돼서 배우에서 감독으로 상황을 바꿨는데 감정이 훨씬 잘 전달되더라.
- ‘잘 봤다’는 말은 감독으로서 자주 듣고 또 자주 하게 될 텐데.
= 맞다. 기자님도 그렇지 않나. (웃음) 콘텐츠 관련 직종 종사자들, 창작자들은 다 비슷한 경험이 있더라. 얼마 전에 동기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기들 중 누구는 입봉하고 누구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고, 서로의 커리어를 대충 아니까 대놓고 묻진 못하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조금씩 말이 오가게 됐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네 영화 좋은 작품이잖아”라고 하자 “어디가 좋았어?”라고 반문했는데, 답변의 맥락상 그 친구가 영화를 보지 않은 게 드러난 거다. 이번 영화에서는 서로의 작품에 관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상황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화면에서도 들리는 대사는 하나도 없고, 둘 다 고민만 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마디 던지는데, 그걸 계기로 말다툼이 벌어진다.
- 하루 만에 모든 촬영을 소화했다고.
= 이런 일정으로 찍어본 건 처음이다. 신을 순서대로 찍는데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사실 영화 보러 와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대화해봤자 10~15분 남짓 아닌가. 그런데 이 둘은 그림상으로 보면 담배 한대 피우자고 같이 나가서 6~8시간을 떠든 거다. 판타지와 다름없다. (웃음) 색보정으로 밝기를 올릴 수 있지만 후반부에 둘이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주고받기 때문에 해질녘의 느낌도 괜찮겠다 싶었다.
- 이번 작품에 관해 동료 연출자들의 평을 들었나.
= 아직 못 물어봤다. 무섭다. “네 영화 좋더라, 잘 봤다” 이럴까봐. (웃음)
- 영화와 음악, 그림, 글 등 표현할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한 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포맷을 결정하나.
= 이야기만 있다면 소설로, 노래로도 만들 수 있고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건 영화가 돼야 해’라고 특정 포맷을 결정하기보다 그때그때 어떤 기회가 닿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이야기를 꺼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 이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 독립장편영화로 기획했으나 현재는 드라마로 작업하기 위해 더 대중성 있는 스토리로 바꿔가고 있는 작품이 있다. 새로운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표다. 친언니가 죽었을 때 상주가 돼서 장례를 치렀다. 그때 장례문화가 변화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동안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았던, 내가 목격했던 진짜 죽음의 장면들을 그려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