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는 수학여행을 가는 대신 어설프게 동반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두 사람의 관심사는 폭력의 가해자 채린(정이주)에게로 옮겨진다. “어차피 죽을 거 박채린 인생에 기스라도 내야 되지 않겠냐?” 자신들을 괴롭히다 서울로 전학 가버린 채린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살을 잠시 미룬 나미와 선우는 서울행을 택한다. 그러나 낯선 대도시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채린은 예전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선하고 평온한 얼굴로 나미와 선우를 놀라게 만든다. 피해자인 자신들은 지옥 속에 살고 있는데 가해자인 채린은 복수가 두렵지도, 용서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단 것이 두 사람은 도무지 참기 힘들다. 그런데 지켜보다 보니 채린이 간절히 믿고 있는 낙원과 종교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전도사 명호(박성훈)를 포함한 종교 단체의 구성원들은 채린과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가 영 수상쩍다.
학교 폭력 피해자인 두 소녀의 복수를 위한 상경기라는 점에서 가늠해볼 만한 분위기의 영화를 기대한다면 <지옥만세>는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갈 것이다. 두 소녀를 ‘지옥’으로 빠트렸던 가해자가 사이비 종교의 신도가 되었다는 얄궂은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요컨대 영화는 피해자가 된 가해자라는 요소를 부각해 속죄나 용서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학교 폭력과 사이비 종교를 엮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고발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두 주인공의 자살 시도를 능청스럽고 태연하게 묘사하던 극 초반부와 흡사한 태도로, 막연히 탈출 또는 낙원을 꿈꾸지만 지옥 같은 현실에서조차 제대로 발 디디지 못하는 어떤 이들의 위태로운 얼굴을, 불안한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은, 죽으면 편해질 테니 살아서 괴로울 수 있도록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라는 극 중 대사처럼 살아 있기에 죽음보다 괴로운 이들이다. 이처럼 경계와 관계가 모호한 삶과 죽음, 낙원과 지옥의 특성은 나미와 선우를 둘러싼 복수를 위한 동맹이라는 포장지를 슬쩍 벗겨낸 뒤에야 목격하게 되는 축축하고 찝찝한,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인 속내와도 공명한다. 그렇게 이 영화의 ‘탈출이 요원하다면, 만세를 외쳐버리겠다’는 당돌한 외침은 지옥을 맴돌고 있는 나미와 선우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뜻밖의 환기를 경험케 한다.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등의 단편을 연출해온 임오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방효린, 정이주, 박성훈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의 색채가 각자의 역할에 자연스레 녹아드는데, 무엇보다 배우 오우리의 정제되지 않은 매력이 돋보인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 상영작이다.
공동의 적과 공동의 아픔에서 벗어나 비로소 서로의 맨얼굴을 들여다본 나미와 선우. 나미의 사과를 거부하고 비밀을 털어놓은 선우는 서글프면서도 초연한 얼굴로, 극을 관통하는 이 대사를 중얼거린다.
CHECK POINT
<미쓰 홍당무> 감독 이경미, 2008한 여성을 타도하기 위해 뭉친 두 외톨이 여성의 분투를 그려낸다는 것 외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악과 블랙 유머가 섞인 희비극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를 나란히 놓아볼 만하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공효진)과 서종희(서우)야말로 누구보다 대담하게 ‘지옥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들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