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더 문’의 빈틈이 던지는 질문
2023-08-30
글 : 김신

<더 문>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지지부진한 이유는 영화를 감싼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뉘앙스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친 보수적 정서가 영화를 두르고 있다. 이 영화를 ‘국뽕영화’라고 정리하고 넘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데 <더 문>은 거시적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균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균열이 이 작품을 재평가받게 할 요소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균열을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이미지에 관한 몇 가지 논점을 환기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더 문>의 흥행 실패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더이상 국가주의가 흥행 코드로서도 유효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텐트폴 영화의 국가지상주의는 호소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김병규 평론가는 2010년대를 건너오며 한국영화에서 법정과 같은 국민 통합의 장소(<변호인> <아이 캔 스피크>)가 소멸하고, 법 바깥의 폐허가 무대화되고 있다고(<사냥의 시간> <반도>) 관찰한 바 있다. 후자와 같은 유형의 영화에서 치안과 초자아의 논리는 홉스주의적 각자도생의 논리로 대체되고, 정상가족의 모델은 형해화되거나 대안적 공동체의 계열로 치환된다. 최근의 <더 문>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국가가 부재한 세계의 소공동체를 다루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흥행한 현상 또한 국가와 가족의 실패 내지 부재라는 파국적 사태가 더이상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상적 상황이 된 동시대인의 경험을 반영한다.

그런데 <더 문>이 그런 시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정리하는 결론이 마냥 깔끔하지도 않아 보인다. <더 문> 또한 공동체가 해체된 시대의 관객성을 어느 정도 의식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조한철이 분한 과기부 장관의 무능함을 강조하는 대목이 이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문과 출신 관료라서 조난된 우주인을 구조하는 현장의 전문 지식이 부재하다고 언급되는 이 인물은 고유한 드라마를 간직한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관료적 무능함을 캐리커처화된 방식으로 어필하고 조롱당하며 동시대 정치에 대한 관객의 울화증을 해소하는 상상적인 샌드백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치인의 무능함은 냉소적으로 조롱되지만 정작 종막에서 국가지상주의가 시민을 통합하는 결말에 도착하는 <더 문>의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는 이 균열이 모순적 결함이라고 규정하는 대신, 그 자체로 국가가 실질적 이념과 박리된 채 명목상의 기능으로만 인식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징후라고 보고 싶다. 영화는 설령 선전적 뉘앙스를 띨 때조차 일관된 주제의식으로 수렴하지 않는 감각의 복합체다. 복수의 시점에 대한 유동적 동일시를 허가하며 언어적 의식을 하회하는 자율신경계의 지평마저 자극하는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더 문>의 정치적 냉소와 허울뿐인 국가주의적 이념은 논리적으로 상치될 수는 있어도 관객의 감각적 욕구를 충족해준다는 전략적 측면에서는 일관성 있는 기호로 호명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그 전략의 설득력 결여를 흥행 성적이 증언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더 문>은 국가의 실감이 부재한 세계를 영화적 현실로 구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국가적 이념을 선명하게 고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명목상으로만 잔존하는 국가의 실재를 구실로 끌어들이며 구축한 임시적인 오락의 스펙터클에 가깝다. 그렇기에 상충하는 기호들은 버성긴 조합으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더 문>은 차라리 2022월드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월드컵 또한 국가주의적 동일성에 기반하긴 하지만 기실 정치나 국가에 무관심한 이조차 무리 없이 열광할 수 있는 순수한 감각적 스펙터클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이번 월드컵을 보며 국가대표의 이미지가 이전 시기보다 국가적 이념과 한층 분리된 채 소비되는 현상이 흥미로웠다. 2002월드컵 당시 공중파에서 중계된 선수들의 이미지는 광장의 시민을 결집하는 표상으로 호명됐지만, 오늘날의 시청자는 광장의 스크린 대신 개인화된 미디어 채널을 통해 축구 선수와 접촉한다. 시청자들은 국가의 대변인이 아니라 해외 클럽을 오가는 무국적적인 프리랜서들의 개별적 커리어와 셀럽적 정체성에 열광한다. 그들이 종종 이강인의 순수한 면모에 열광하며 나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듯, 이제 국가대표는 개별적인 정체성과 신체적 기표로 소비될 뿐 국가주의적 의미망에 안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문>의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캐릭터이므로 공적 무대 바깥에서 비주류 미디어를 통해 관객과 사적 친밀감을 누적할 수 없으며, 오직 픽션이라는 폐쇄된 질서 내부의 논리를 통해서만 존재론적 정당성을 얻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그 픽션의 논리가 빈약한 것은 물론, 개별적인 캐릭터 아크의 설계도 미비한 <더 문>의 몰입감이 결여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특별히 홍승희 배우가 분한 인물(강한별)이 사적 서사가 완전히 소거된 채 뜬금없이 구조 작전에 소집돼 서사 내내 아무런 인연도 없는 황선우(도경수)의 처지에 과몰입하는 모습은 거의 부조리하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저 몰개성적 인물은 대체 이런 작전에 동원되지 않는 평소의 일상에서는 뭘 하고 살까? 개인의 자리를 소거한 <더 문>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연대에 대한 설득력의 부재는 <더 문>의 인물이 시공간적으로 단절돼 오직 통신으로만 접촉한다는 점으로 인해 배가된다. 유사 부자 관계와 대속의 플롯이 주요 인물을 한데 묶기는 하지만, 주요 인물을 제외한 조연과 시민들은 대부분 아무런 과거도, 공간도 공유하지 않는 포스트 코로나적 세계에 위치해 있다. 수사학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공간적 거리의 근접성이 타인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과 비례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반영하듯, 20세기의 영화사는 전통적이고 국지적인 시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친밀감이 현대화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분열의 기색을 심화하는 과정을 양식의 파열로 드러내곤 했다. 개인화된 디지털 기기에의 접속이 물질적 공동체의 의례와 접촉을 대체한 코로나 시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감독은 한층 파열된 시공간을 묘사하는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시대극이나 SF와 같은 장르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더 문>은 이례적이게도 그 시공간의 해체를 회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해체를 형식적으로 구조화하며 직면하지도 않으면서 해체된 물질적 시공간을 그냥 유사 가족과 국가라는 고리타분한 명분으로 얼렁뚱땅 봉합하는 뻔뻔함을 선보이고 있다. 일견 경직되고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가 기이하게 분열적으로 느껴진다면 이 때문이다.

영화가 국가지상주의의 한계를 자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더 문>은 왜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헐거운 통합의 기획을 채택한 걸까?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이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중간적 공동체가 부재한 한국의 현실을 드러낸다. 세상사를 공과 사라는 이분법적인 항으로 구분하는 일부 지식인의 말과 달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두 영역을 매개할 중간적 공동체의 존재다. 한국영화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거대한 이념에 기대지 않고, 그렇다고 온전히 사적인 세계에만 침잠하지도 않는 소박한 소공동체를 발명해낼 수 있을까. <더 문>의 빈틈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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