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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리는 영탁을 부정할 수 없다
2023-09-06
글 : 송경원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정치가 없다. 그래서 정치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명화(박보영)가 묻는다. “여기 살아도 돼요?” 이 공간에서 거주해도 되냐,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어도 괜찮냐는 이중의 의미를 실은 질문에 누군가 답한다. “살아 있으면 그냥 사는 거지. 뭘 물어.” 명화는 사는 데 필요한 건 자격과 조건이 아니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흰 쌀밥을 꼭 움켜쥔다. 마치 종교화처럼 쉽고 간명한 상징과 우화의 이미지. 중세 암흑시대 교회 프레스코화에 가까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메시지. 정정해야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다. 이어 그 실패의 자리에 어떤 호소보다 강력한 동일시가 이뤄진다. 다름 아닌 영탁(이병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굴리는 시뮬레이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다만 이 영화 속 낙원의 기본값은 한국 사회의 아파트에 맞춰져 있다. 오늘의 주거가 아니라 미래의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아파트. 그렇게 장밋빛 미래에 현실을 저당 잡힌 이들이 서로 탈출할 수 없도록 어깨 걸고 행진하는 지옥의 입구에 한국의 아파트가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역사의 태엽을 거꾸로 감아 발전 과정을 뒤섞으며 비틀리고 위장되어 마침내 실패할 모든 낙원들을 경유한다.

첫 번째 낙원은 계급사회다.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한 황궁 아파트는 한정된 자본이라는 환경하에 주민과 외부인이란 계급 구분을 통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한다. 누군가는 여기에 저항하고 누군가는 절충안을 고민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두 번째 낙원은 사냥을 중심으로 한 원시공산제다. 아파트 자치회는 생존을 목표로 방범, 의료, 정비, 배급이라는 기능으로 위장한 전근대적 조직을 구축한다. 머지않아 두 번째 낙원 역시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외부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불신과 분열, 외부의 침입으로 붕괴된다.그리하여 명화가 도달한 마지막 낙원은 수직의 아파트가 무너지고 수평의 시점에서 된 사회다. 하얀 쌀밥은 한줌 온기와 희망으로 포장되었지만 그보다 직관적인 건 농경사회의 표상으로의 상징성이다. 상징과 도식으로 가득한 우화의 세계에서 명화가 거쳐가는 (헛된) 유토피아들 그 자체가 메시지의 일부다. 마지막 안식처는 수렵에서 농경 단계로 넘어온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직접 농사를 짓는다기보다는 쌀이 주는 이미지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핵심은 표상, 그러니까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다. 연장선에서 명화가 민성(박서준)과 함께 여기까지 걸어오는 중 마주한 바퀴벌레 리더(엄태구)의 존재 역시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식인으로 짐작되는, 뼈다귀를 들고 있는 수렵인의 모습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정치가 자리를 비우면 사연이 변명이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 폐쇄된 커뮤니티에서 인간의 본성을 응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의 동력은 사람들을 일시에 원시시대에 떨어트린 뒤 사회, 정치, 경제 제도가 재구축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서 발생한다. 인간과 사회, 두 욕망을 양립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본래의 목적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데 장대하게 실패한다.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그 덕분에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을 투명하게 비추는 데 성공한다. 영화가 지지하는 인물은 명백하게 명화쪽이다. 명화가 이타적이고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영탁은 내 집, 민성은 우리 가족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명화는 생존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끝내 사람답게 ‘사는’ 걸 지켜내는 캐릭터다. 최후의 생존자로 다음 세대인 혜원(박지후)이 아니라 명화가 선택된 것 역시 명화의 중립적인 위치 때문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끝내 모든 걸 포기하고 합리화하지 않는 태도는 정확히 보통 사람이 감정을 투사할 수 있는 평범함에 가깝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화보다 영탁에 감정을 투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더 가깝고 편안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나 덧붙인다면 장면의 의도와 설정마저 초과하는 배우 이병헌의 괴력을 들 수 있겠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민성이다. 영탁과 명화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아주 단순하게 축약하자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명화의 세계에 속했던 민성이 생존을 명분으로 영탁의 세계로 휘말려 들어가는 이야기다. 엄태화 감독은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세계로 민성이 빠져드는 것을 죽음으로 저지시킨다. 민성의 죽음은 변모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세계로 되돌리기 위한 희생이다. 본래 영화가 구축한 의도를 따라간다면 관객은 민성에 감정이입하여 명화가 제시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양심에 안착해야 마땅하다. 착취의 수렵에서 나눔의 농경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설득에 장렬히 실패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정치를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정치란 방향이다. 대화와 타협, 조정을 통해 특정한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행위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역사의 흐름과 정치의 자리에 개인의 사연을 꽉꽉 채워넣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꿈꿨던 모순과 역설의 디스토피아는 메시지를 강변하는 대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해방운동 슬로건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하여 의도치 않은 하나의 정치적 위치를 점하는데, 다름 아닌 관찰, 아니 방관의 자리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사연이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선 중점적으로 민성과 영탁의 사연이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명화 혹은 도균(김도윤)이란 방향성을 방치해버린 영화는 두 갈림길 사이에서 어떤 추동력을 얻지 못한다. 남은 건 감정적으로 가장 가깝고 닮은 쪽으로 작동하는 인력이다. 즉 우리가 영탁의 드라마에 끌리고 동감한다면 그게 바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란 증거다.

영화 초반 영탁은 왜 그렇게 치열하게 1층의 불을 끄는가. 이후 반상회 장면을 보면 리더가 되겠다는 의도 따윈 없다. 영탁은 그저 욕망의 찌꺼기다. 사기를 당하고 가족을 잃었을 때 영탁은 이미 죽었다. 남은 건 행복한 우리 집이 될 거라고 믿었던 아파트를 향한 욕망뿐이다. 함께 사는 집으로서 수단을 상실한 아파트는 재난 이후 살아남기 위한 집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영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파트를 지켜야 한다. 그 절박한 광기는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아파트라는 자산에 목매는 한국 사회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내 집값, 내 자산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정치를 지운 공동체에 유토피아는 없다. 사회의 근간이 무너져 내리는 걸 목격하면서도 우리는 영탁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알기에 차마 그를 부정할 수 없다. 비틀린 광기의 씨앗이 파국의 꽃을 피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사회는 ‘영탁’이라는 미몽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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