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카메라 너머의 얼굴들, ‘보호자’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09-06
글 : 유선아

한 사람에게 시련을 안기면 드라마가 되고 집단에 재앙을 내리면 재난영화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인물에게 위기를 주어 그들의 선택을 지켜보게 하는 동안에 어떤 카메라는 그 얼굴을 주시한다. 두편의 한국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보호자>를 연이어 보고 하나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 이유는 많은 점이 상이한 두 영화에서 도드라진 공통점으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신체 이미지에서 시작된 얼굴의 클로즈업은 현대 상업영화에서는 또 다른 영화적 장소로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기보다는 얼굴의 향연에 가깝게 전시되는 듯하다. 상업영화에 스타의 얼굴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의 클로즈업이 그저 영화의 부품처럼 장면의 최소 단위 기능만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반대 지점에서 접근한다면 근접한 얼굴숏은 어떤 기능만큼은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호자>에서는 무엇과의 사이를 벌리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어떤 것을 예고한다.

<보호자>의 서사적 설정은 가깝게는 <아저씨>, 멀게는 <더 이퀄라이저>나 <테이큰>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언급한 영화와 <보호자>의 지극한 차이는 주인공인 수혁(정우성)이 구출해야 할 대상이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도, 다정했던 이웃도 아닌 이제부터 ‘사랑해야 하는 딸’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그 딸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없다고 믿고 있다. 구출이 완료 단계에 다다랐을 때 구원자인 동시에 아버지인 수혁과 마주한 딸의 대사(“누구세요, 아저씨?”)는 이 관계 사이의 거리를 완벽하게 정의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보호자>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얼굴 클로즈업은 어떤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거리감은 영화 안과 밖에서 <보호자>를 관통한다. 예를 들어 차량 충돌로 죽음을 맞이하는 민서(이엘리야)의 얼굴이 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민서에게서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은 죽음의 명확한 전달과 거리를 둔다. 같은 신에서 수혁은 눈물을 보이며 이미 민서의 죽음을 감지하지만 죽음의 선언은 그들의 딸인 인비(류지안)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선언된다.

중국집에서 만난 수혁과 준호의 숏-리버스숏의 얼굴, 차 안에서 방화의 사연을 공유하는 우진(김남길)과 그 청자인 수혁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의 얼굴이 대사를 읊거나 듣는 리액션 숏으로 기능하는 동안에 얼굴의 클로즈업은 표면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얼굴에 가까이 다가간 이미지가 상승하여 의미를 쟁취하거나 전락하여 소모되는 것도 아닌 그저 대사를 말하는 얼굴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나아가 단조로운 얼굴 클로즈업의 반복은 지금 목격하는 것이 캐릭터의 얼굴인지 배우의 얼굴인지 모를 혼란마저 야기한다. 내러티브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익숙한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은 얼굴이 렌즈와 가까워질수록 보는 이에게는 생경해지는 기이한 상황에 이른다. 이렇게 확대된 얼굴 이미지가 정동의 증폭과 쇠락 사이에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을 때 얼굴의 클로즈업이 획득하게 되는 것은 낯섦이다. 지척의 얼굴 이미지를 담은 카메라의 기술은 우연하게도 영화 속 얼굴을 바라보는 이에게 수혁의 딸인 인비가 제 아버지에게 가지는 낯섦과 동일한 거리감을 전한다.

가히 숱한 얼굴의 난립이 이뤄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얼굴로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 클로즈업에 대해 말하기가 꺼려질 정도다. 개별의 얼굴은 군집을 이루어 영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모자이크처럼 심상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얼굴 클로즈업을 말하려면 먼저 몽타주 시퀀스부터 짚어야 한다. 우선 영화는 몽타주 시퀀스로 영화를 연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 카메라는 외부인 퇴출 안건을 두고 부녀회장의 집에 모인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얼굴에서 얼굴로 이동한다. 이토록 다양한 얼굴의 골격과 곡선을 보여주는 데 최초의 목적이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의 전환은 모델 하우스를 제시하듯 다양한 모델로서의 한국인, 동시에 인류의 얼굴을 제시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각각의 얼굴이란 인간 군상의 한 조각이며 얼굴의 조각들은 몽타주 시퀀스, 나아가 영화 전체를 아우르며 대거 집결한다. 그래서 얼굴의 클로즈업과 몽타주는 서로의 환유이자 대유인 수사적 관계를 이룬다.

저쪽을 바라보고 있어도 이쪽을 향해 박력을 떨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얼굴들은 부정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얼굴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순간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첨언되는 장면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드러낸다. 민성(박서준)은 처음부터 상처투성이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다친 손을 들여다보는 민성의 얼굴 클로즈업은 카메라가 얼굴에서 어떤 정서를 포착하고 있는지에 대해 함구한다. 민성의 회상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오고 나서야 처음의 얼굴은 행인을 구하는 데 실패한 한 소시민의 좌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얼굴 쓰임의 정점은 <아파트>를 부르는 영탁(이병헌)의 시퀀스다. 영탁의 옆집에 살았었다던 혜원(박지후)이 황궁 아파트로 돌아와 그를 모른다고 말한 이후 영탁의 옆얼굴은 의미심장해진다. 노래가 시작되고 사방이 재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영탁에게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영탁의 얼굴로 다시 돌아오면 시퀀스는 전환된다.

말하자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얼굴이란 배열된 플롯을 여닫는 챕터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도균(김도윤)의 집에 음식을 나눠주는 명화(박보영)를 멀리서 지켜보던 영탁의 얼굴은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며 예고로 기능하는 얼굴의 이미지다. 여러 번 열렸다 닫히는 얼굴의 반복은 얼굴과 얼굴 사이의 균열 속에서 서사를 발굴해내는 데 집중한다. 파묻힌 서사를 여는 얼굴과 닫는 얼굴 중에서 처음의 얼굴은 상대적으로 나중에 드러난 얼굴보다 미약한 정서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기능의 반복으로 인해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 다가오는 최후를 기다리는 영탁의 얼굴 클로즈업은 그 강렬한 명암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힘을 제대로 발휘했다 말하기 어렵다. 그 얼굴은 황궁 아파트라는 공동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평범했던 악인의 페이소스가 담긴 비참한 종말 대신 서사의 종결을 알린다. 기능의 반복으로 얼굴의 의미가 희생된 경우다.

두 영화에서의 얼굴이 반드시 실패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습성처럼 얼굴의 클로즈업을 대사 전달의 기능으로만 사용할 때 얼굴이 가지는 의미는 그가 전달하는 시각적 정보에서부터 점차 퇴색할 것이다. 카메라가 사물에 가까이 다가서려 할 때 그 화면은 정서의 증폭과도 면밀한 관계여야 한다. 그것이 얼굴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지 얼굴의 조형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굴을 담아낼 것인가, 그 너머의 무엇으로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얼굴이 가진 표면의 차원을 넘어 조금 더 영화적 공간으로서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에 진실로 발화하는 얼굴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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