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달짝지근해: 7510’ 배우 김희선, 나와 닮은 사람을 연기한다는 것
2023-08-31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낙천성. 이것은 일영(김희선)이 지닌 무기이자 힘이다. 나날이 불어난 빚 때문에 캐피털 회사에 불려갔을 때도 그는 오히려 “일자리를 달라”며 명랑하게 응수한다. 미혼모로서 홀로 딸을 키워온 일영은 온갖 풍파에도 회피하기는커녕 정면돌파로 나아간다. 자기만의 단단한 내공을 쌓아온 일영의 사랑을 그리기 위해, 배우 김희선은 평소보다 더 산뜻한 톤으로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푼수 같은 웃음,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직진하는 모습 등 김희선이 분한 일영을 보다 보면 문득 드라마 <미스터 Q>의 해원과 <토마토>의 한이가 자라 일영이 된 게 아닐까, 엉뚱한 상상에 빠지게 된다. <달짝지근해: 7510>의 ‘달짝함’을 맡아 로맨스의 설렘을 높인 김희선 배우를 만났다.

- <전국: 천하영웅의 시대> 이후 10년 만에 영화 출연을 결정했다. 처음엔 고사했다고.

= 영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고민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한 감독님께서 손 글씨로 빼곡하게 쓴 편지 2장을 주셨다. 왜 일영을 김희선이 해야 하는지 이유를 담아주신 거다. 그리고 또 2장의 편지가 있었다. 혹시나 손 글씨를 못 알아볼까봐 같은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서 출력해 오셨다. 그때 감독님이 너무 귀여웠다. (웃음) 그 진심이 와닿아서 감독님을 믿고 따르게 됐다.

- 이한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김희선이 아닌 일영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보았을 때 일영을 어떻게 분석했나.

= 내가 봐도 일영은 나와 많이 비슷해 보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거침없이 올인하고 망설이지 않는 태도가 가장 닮아 보였다. 또 시종일관 밝은 모습이나 긍정적인 마인드도 내 평소 모습과 비슷하다. 연기할 때 여러 역할을 옮겨 다니며 변주하지만 그래도 나와 닮은 역을 맡을 때 연기가 가장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실 일영은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인물이다. 내 주변에도 일영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이 전염되니까. 그래서 더더욱 치호(유해진)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 관계적으로 일영이 치호의 어떤 점을 보완해준다고 생각하나.

= 치호는 사교성이 적고 폐쇄적인 인물이다. 남들과 무언가를 함께할 생각 자체를 못한다. 그에 반해 일영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를 즐긴다. 닫혀 있던 치호의 세계를 열어주고 타인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친형 석호(차인표)와의 관계가 유일했던 치호에겐 관계적 다양성이 결핍돼 있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 이번 작품으로 만난 유해진 배우와 매우 빠르게 친해졌다고.

= 어느 날 한창 촬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스탭들이 웅성거리더라. 유해진 배우가 찾아온 것이다. 유해진 배우는 자신의 촬영이 없을 때도 자전거를 타고 촬영장에 나타났다. 그렇게 스탭과 배우 모두를 아우르며 챙기는 모습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가까워졌다. 워낙 유해진 배우가 웃기기도 하고. 혹시 이런 미담을 위해 왔던 거 아냐? (웃음)

-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내일> <블랙의 신부> 등 지금까지는 주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활용해 왔다. 이번 <달짝지근해: 7510>에서는 평소와 달리 하이톤의 목소리를 사용했는데.

= 나도 모르게 <토마토> 시절의 목소리가 나왔다. 발랄함을 장착하다 보니 자연스러웠다. 근데 그게 나다. 진짜 좋을 때 나오는 김희선의 모습이었다. 역할과 상황에 따라 목소리 톤과 높낮이를 변형하는 게 중요하다. <품위있는 그녀>에서 우아진은 일영과 비슷한 나이대지만 모든 여자들의 워너비인 능력 좋은 여성이기 때문에 훨씬 낮고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에 비해 일영은 로맨스 서사를 바탕으로 더 가볍게 조절했다. 이번 작품은 중년의 평범한 사랑을 보여준다.

- 2030세대에 비해 중년의 로맨스는 소재로서 덜 다뤄지는데, 일영과 치호의 로맨스는 어떤 특징을 갖는다고 생각하나.

= 일영과 치호의 사랑은 순수하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은 20대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그건 서로의 조건과 배경을 따지지 않는 치호와 일영의 진심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일영이 치호에게 빠진 순간도 그렇다. 캐피털 회사에서 욕을 내뱉는 성인 남자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얼굴 장난을 치는 치호의 모습에서 일영은 자신과 같은 순수함을 발견한 것이다. 둘은 다르지만 같다.

- 로맨스만큼 이별도 평범하게 그려진다. 여느 헤어짐이 그러하듯 치호와 일영의 이별도 구슬프고 어렵고 담담하다.

= 감정선에서는 20대 연애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했지만 중년의 사랑에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생겨난다. 바로 내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용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더 많은 점검표가 생겨난 것과 같다. 일영은 홀로 키워온 딸이 있는데 이 아이가 치호를 반기지 않는다면 관계 유지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 치호 또한 하나뿐인 친형의 의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누구도 잘못한 게 없는데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누군가가 실수하면 실망감으로 헤어지기 편할 텐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일영과 치호는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너무 슬프다. (눈물을 닦으며) 아우, 갑자기 눈물이 나네…. 사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이 하나 있다. 낙원상가 앞에서 이별을 고한 일영이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 치호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데 유해진 배우가 땅에 주저앉아버린 거다. 카메라도 치호를 조금 늦게 따라간다. 그 장면이 너무 애절해서 기억에 남는데 감독님의 결정으로 빠져 있더라. 슬픔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기술 시사로 영화를 보는데 이별 장면이 너무 슬퍼 눈물이 많이 났다. 휴지가 없어서 마스크로 눈물을 닦을 정도였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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