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이 지면에 영화 기자의 비애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씨네21> 기자라면 넘어야 할 산 몇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담력 약한 사람도 공포영화를 보고 기사를 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영화잡지 편집장의 비애도 있다. 영화와 드라마의 스포일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최근엔 <마스크걸>에서 누가누가 죽음의 퇴장을 맞이하는지 스포당했다. 자고로 영화잡지 편집장이라면 스포일러에 의연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보지 못했으나 이미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들이 자주 생겨난다. 이번주 긴 페이지를 할애해 소개하는 <어파이어>의 시사회 기회를 놓쳤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인터뷰, 페촐트의 배우들, 지난 작품들, 독일 영화사에서의 위치 등을 총정리하고 났더니 <어파이어>를 보지 않았는데도 <어파이어> 속 붉게 물든 하늘을 이미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씨네21>은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에 늘 애정을 보내왔다. <어파이어>는 그의 10번째 장편영화다. <피닉스> <트랜짓> <운디네> 등을 통해서, 특별한 미적 감식안을 지닌 국내 예술영화 관객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페촐트 감독이 <어파이어>의 개봉을 앞두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씨네21>도 냉큼 달려가 그를 만났다.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대목은 역시나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그는 “영화를 크게 자동차의 영화와 지하철의 영화로 나눌 수 있다”고 했는데,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병원, 호텔, 해변 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계층이 섞이면서 무언가가 발생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이야기이자 사회의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페촐트는 “역사의식과 공간을 매개로 정체성에 관한 드라마”(송경원)를 만들어온 감독이다. 역사 3부작으로 묶이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이나, 원소 3부작의 시작으로 얘기되는 <운디네>에서도 역사적 장소로서의 독일과 베를린이라는 무대는 중요하다. 페촐트의 인물들은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켜켜이 새겨진 장소를 상실감과 비애감에 젖어 배회하곤 한다. 그런 페촐트 감독이 ‘한국의 지하철’에서 경험한 일화가 마치 영화 같아서 재밌었다. 인터뷰 장소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페촐트 감독은 지하철에서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다리에 타투를 한 여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느낀 순간 그 여성이 다가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크리스티안 페촐트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서울의 지하철에서 페촐트를 만날 확률, 아니 지하철에 탄 승객 중 페촐트를 알아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양쪽 모두 희귀한 일인 건 분명해 보인다. 현실이 영화를 닮아가는 건지 영화가 현실이 되어가는 건지. 페촐트 감독과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국 관객이 서 있었을 서울 메트로의 열차 안, 신비롭게 반짝하고 빛났을 그 순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