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꽤나 근사하게 만들어진 한국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주된 긍정적 평가는 영화가 깔끔하다는 것이다. 스릴러, 공포, 오컬트, 코미디와 같은 장르의 클리셰를 활용하면서도 지저분하게 뒤섞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의 성취를 설명하는 정확한 진술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의심에 말을 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비록 그 절차가 다소 부정확한 단언과 과장을 동원한다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좀처럼 서스펜스의 안쪽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편이다. <잠>이 몰입의 충실함을 관객의 역량으로 불러들이는 영화라면, 나는 전적으로 실패한 관객이다.
밀고 당기는 스펙터클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떠올린 것은 영화와는 다소 무관한 징후들이었다. 신혼부부의 불안과 몽유병이라는 불확정적 상태의 중첩으로 극을 이끌던 스릴러가 빙의, 무속과 같은 요소들을 불러들일 때, 장르를 확장하고 변주하는 개성만큼이나 영화가 기어코 한국형 오컬트라는 장내에서 호명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감지했던 것 같다. 장르를 답습하는 움직임과 그것을 부수고 해체하는 움직임이 거의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지극히 새로워 보이는 시도들조차 시스템이 수용할 수 있는 일탈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단순화된 잠의 기능
영화 제목에서부터 청결에 대한 의지가 드러난다. ‘잠’이라는 단순한 제목은 영화가 잠이라는 단어의 속성 정의에 기대서 이를 활용한 특수한 서사를 전개하는 동시에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질로 수렴하는 영화의 구조를 예비한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 제목을 통해 추상적 표현(<기억의 밤>)이나 특정적인 명사(<세이레>)로 표상되려 하는 경향과는 구별된다. 물론 제목의 이러한 인상에는 5시간이 넘게 잠자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잠>과 같은 구조주의 영화가 연상되는 탓도 있을 테다. <잠>의 제목은 소재나 정서를 강조하는 대신 신체의 물리적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관습적 해석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전략을 구사하는 기호다.
물론 유재선 감독의 <잠>은 내러티브 영화이고, 함께 위기를 타개하려는 신혼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1장은 신혼부부의 단란한 풍경과 남편 현수(이선균)의 몽유병이 시작되면서 부서지는 일상의 전조를 보여준다. 수진(정유미)의 출산으로 시작하는 2장에는 아이가 생기면서 집 안에 첨예한 긴장이 들어선다. 아이를 지키려는 수진의 신경증은 점점 과열되다 현수의 귀접을 의심하게 되고, 3장에서는 수진의 광기가 정점에 이르며 집 안을 퇴마의 무대로 바꿔놓는다. 영화가 신혼부부의 고충이나 층간소음, 육아 문제처럼 액션과 리액션이 다분히 예측 가능한 서사를 다루기에 인물의 행동과 동기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장과 장 사이는 시간의 생략을 통해 단절되어 있다. 장이 바뀔 때마다 영화는 드라마에서 스릴러, 오컬트로 영화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도약과 비약을 수용하는 장막 구성은 영화가 복수의 장르들을 가로지르면서도 결코 오염되지 않고, 장르들의 본성을 훼손시키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장르적 긴장 상태를 감지하게 한다.
<잠>은 서사로 봉합되지 않는 단절을 통해 장르들간의 긴장 상태를 드러내며 자신의 혼종성을 감춘다. 영화가 잠이라는 불안정한 무의식 지대를 다룬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러한 단절은 묘한 지점이다. 잠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잠은 현실과 몽롱하게 뒤섞이면서 혼돈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잠은 꿈과 현실 사이를 불확정적으로 중개하고 착란과 환상을 불러들이는 끈적한 소재다. 그러나 <잠>에서는 꿈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현수가 잠을 자는 모습을 수없이 보여주지만, 그 잠의 안쪽은 해부하려 들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꿈은 새벽 내내 잠든 현수를 감시하다 늦은 잠에 든 수진이 꿈속에서 딸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적이는 악몽이다. 깨어난 수진은 잠든 현수가 그랬던 것처럼 기행을 벌인다. 수진의 잠이 현실에 침범하면서 위협이 되는 찰나, 영화는 서둘러 2장을 마무리하며 수진의 광기와 믿음의 문제로 도약해버린다. 이렇듯 영화는 잠의 성질을 활용해 내부의 픽션을 강화하는 대신 의식과 시간의 단절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적 전환의 기능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잠>에서 잠은 가장 단순화된 형태로 제시되며, 끄고 켤 수 있는 스위치처럼 다뤄진다. 잠은 사람의 영성이 가장 약해지는 때이기에 귀신이 드나들 수 있는 영매의 시간이 되고, 다정한 부부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는 관계로 전복되는 시간이 된다. 화면의 모드를 바꾸듯 드라마에서 스릴러로, 스릴러에서 오컬트로 뛰어넘고 잠은 그러한 순간 이동을 가능케 하면서도 영화가 서사로부터 탈각되지 않기 위한 지지체가 된다. 이러한 기능에는 잠의 세부적이고 경험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세정되어 있다.
영화가 잠의 성분이 아닌 기능을 활용하는 점을 주목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보디 스내처의 모티프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이 인간의 신체를 빼앗는 순간은 그가 잠에 들었을 때다.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는 영상비평지 <마테리알>의 오픈 스페이스에서 보디 스내처의 무서운 점은 비인간과 인간,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판단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수진의 시점에서 더이상 현수가 잠든 상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신체 강탈자
현수에서 수진으로 기행의 주체가 이동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이질적 존재의 침입이라는 보디 스내처로부터 한 사람을 집어삼킨 편집증적 광기에 대한 보디 스내처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1장부터 쌓아올린 단서들을 빼곡하게 활용한다. 수진과 현수의 직업이 각각 직장인과 배우라는 사실은 3장의 클라이맥스를 지탱하는 단서들이 된다. 부적이 가득한 집 안에서 수진은 자신의 믿음을 관철할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고, 현수는 자신의 몸짓을 무대화한다. 영화는 종교적 광신이라는 환영과 이를 이성적으로 해명하려는 합리성의 신화가 부대끼면서 오컬트와 코미디가 대치하는 자리에 자신의 몸체를 내어준다. 영화는 정신이 스스로의 몸을 침탈할 수 있는지, 그러한 방식의 보디 스내처가 가능한지 살피면서 주체와 타자, 광기와 신체 사이의 미묘한 영역을 영화의 역동으로 탐구하는 대신 한국형 오컬트라는 과포화된 시각성의 장르로 가시화하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상업성을 둘러싼 요소들간의 위계를 드러내면서, 영화는 가장 개성을 분출하는 순간에 시스템이라는 제도적 한계 막을 불러들인다.
모든 것을 구하고, 또 모든 것을 망친 뒤 수진은 잠에 든다. 길고 깊은 회피에 빠진 사람의 얼굴. <잠>은 지저분한 것들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 비평은 영화의 깔끔한 짜임새를 상찬할 수 있지만, 그 청결한 풍경을 지탱하는 여분의 세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상업적 시스템을 향한 눈짓과 아부가 없는 장편영화가 가능한 판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김병규 평론가의 말에 응답하고 싶었다. 그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아직은 묘연하지만, 그 길목에서 비평이 붙잡거나 떠나야 하는 것들을 가늠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