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물음표를 느낌표로, ‘거미집’ 전여빈
2023-09-27
글 : 정재현
사진 : 최성열

전여빈이 인터뷰 중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촬영)현장’이다. 전여빈은 현장에서 에너지의 총력을 소진하고 싶고, 현장에 출근한 사람들이 언제나 궁금하며, 현장에서 연기의 답을 찾는 배우다. <거미집>의 ‘미도’ 또한 그렇다. 제작사 신성필림의 후계자인 미도는 김열 감독(송강호)의 재촬영 시나리오에 열광한 채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거미집’의 현장을 누빈다. 현장 체질인 배우가 현장 체질인 배역을 만났을 때 스크린 속에서 얼마나 생동할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도는 김열 감독을 포함한 등장인물 모두가 걸작이 탄생할지 의심하는 와중에 홀로 다 잘되리라 굳게 믿는다.

= - 미도는 김열의 예술 세계와 욕망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캐릭터다.

영화 촬영 현장은 영감과 창작의 동력인 주체와 그의 상상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조력하는 이들의 합으로 구성된다. 미도는 능동적인 예술가까진 아니어도 예술가가 세상에 재능을 펼칠 수 있게 힘을 보태는 사람이었을 거다. 그때 김열 감독을 만나 미도의 심장이 예술혼으로 타오르지 않았을까. 미도는 MBTI 검사를 하면 INFP(열정적인 중재자형)와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형)가 번갈아 나올 텐데, 촬영장의 다른 이들과는 ‘I(내향형)’로 지내다 자기가 믿는 김열 감독 앞에선 ‘E(외향형)’가 될 것이다.

- 미도는 신성필림의 유능한 실무자이기도 하다.

= 결과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인데, 나는 미도를 말리고 싶었다. 유일무이하게 김열 감독을 지지하는 일꾼이지만 정작 미도가 도우면 도울수록 상황은 꼬여간다. 그건 미도의 어설픔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도의 정제되지 않은 어설픔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갈 때의 모습이 아닐까. 갑자기 뜨거운 사랑에 빠지면 이전의 능숙함이 사라지듯 말이다. 그 어설픔을 보고 어떻게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며 함부로 말하겠나.

- 촬영 전 1970년대 영화 제작 환경에 관해 찾아보았나.

= 그렇진 않았다. 최대한 대본에만 집중하려 했다. 영화는 결국 재창조의 산물이고 내가 배우로서 구현해야 할 또 다른 역사다.

- 미도와 같은 연출부나 제작부를 만난 적 있나.

= 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양가감정이 든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의문이 들고, 그러다 고마워하게 된다. 그리고 이내 그 사람의 태도를 수긍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가 갖고 있는 열정의 온도가 내 마음에 딱 붙기 시작한 순간 그 열기가 오래 머문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작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애정이 이따금씩 생각난다. 그리고 얼마간 경력을 쌓은 후에 연마할 기술을 고대하게 된다.

- <거미집>의 제작 발표회 때 “학창 시절 정수정을 마음에 안 품은 여자 없다”고 고백해 화제를 모았다.

= 그 고백은 모두에게 했다. 임수정 선배에겐 “선배님, 제가 <장화, 홍련>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은채처럼 무지개 니트와 어그 부츠도 사봤습니다. 섀기 커트도 해봤습니다”라고 고백했고, 장영남 선배에게도 만날 때마다 사랑을 고백했다. 물론 송강호 선배와 (오)정세 오빠에게도 매일 애정과 존경을 고백했다.

- <여자들>(2017)로 <씨네21>과 만났을 때 물음표와 느낌표가 생기는 배역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적 있다. 미도는 어느 문장부호에 가깝나.

= 왕느낌표, 아니 왕왕느낌표 땅땅땅이다. 그런데 처음 미도를 만났을 땐 물음표뿐이었다. 연기자 입장에선 미도의 템포를 어떻게 완급 조절할지 고민이었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분장한 배우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연기하는 순간 폭죽이 동시에 터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동료들과 함께 거대한 폭죽 놀이를 하며 밤하늘을 수놓자고 결심했다. <거미집>의 현장은 에너지의 충돌이 상당했다. 그래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상대가 진심으로 전해주는 에너지를 흘려보낼 수도 있어 동료 배우들의 모든 기운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려 했다. 돌아보면 지금껏 만난 모든 캐릭터는 물음표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현장만 가면 모두 명쾌한 느낌표로 바뀐다.

- 다른 배우들은 ‘거미집’에서 배우 역할이라 70년대 한국영화 특유의 연기 양식을 선보인다. 하지만 미도 캐릭터엔 시대를 특정하는 연기가 요구되지 않아 배우 입장에선 자유롭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 실은 다른 배우들이 부럽기도 했다. ‘거미집’ 속 배우로 새로운 연기를 펼쳤을 때와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때의 이격을 경험해본 것 아닌가. 미도는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고 에너지가 무한급수로 발산하는 아이라 연기하기가 자유로웠고 동시에 까다로웠다. 연기는 객관식보단 주관식 시험문제에 가깝다. 주관식 시험문제의 답은 채점자의 납득 여부에 따라 정답, 오답이 결정되지 않나. 채점자로 비유할 수 있는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정답 판정을 받고 득점하기 위해선 나부터 스스로의 연기에 설득돼야 한다. “이 행동이 맞을까?” “이 캐릭터는 정말 이렇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확신이 들어야 관객에게도 공감을 선사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굉장히 세밀하게 연출과 상대배우와 호흡하려 하고, 모든 세포를 열어둔 채 두려움은 잠시 접고 모든 가능성을 타진하려 한다. 그 상태를 만들어놓은 후 현장에선 내가 가진 에너지의 최고치를 테이크마다 쏟는다. 이것이 배우 전여빈이 지닌 집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 신에 연연할 것이고 매 테이크에 애정을 부을 것이다. 설령 연기가 인간 전여빈을 옭아맬 정도로 힘들지라도 현장에서만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미도의 태도와 맞닿은 답변이다.

= 그래서 미도가 좋았다. 미도처럼 서툴더라도 가진 패를 다 내어놓는 사람을 좋아한다. 미도는 변명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다. 어설프더라도 끝까지 해내는 미도가 참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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