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화란’ 김창훈 감독, 파국의 삶에 한 줄기 빛을
2023-10-19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 외에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다는 김창훈 감독은 한때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장편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궁리하다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화란>은 당시 김창훈 감독이 경험했던,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과 악순환을 녹여낸 시나리오였다. 의붓아버지로부터 오랜 가정 폭력을 당해온 소년 연규(홍사빈)는 명안시의 범죄 조직에서 중간 보스를 맡고 있는 치건(송중기)을 만나면서 그 역시 폭력성을 학습하게 된다.

-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가 <화란> 시나리오를 눈여겨봤고, 이후 송중기가 관심을 보이면서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었다. 주인공 연규 역에 과감하게 신인 홍사빈을 캐스팅한 점도 눈에 띈다.

= 코로나19 때였다. 한재덕 대표님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진짜로 하고 싶은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화란> 시나리오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 전달하셨다. 그때 송중기 선배님이 주인공 역할이 아닌데도 <화란> 시나리오를 읽고 함께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고 알고 있다. 선배님은 홍사빈, 김형서 배우는 물론 신인감독인 내가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연규 역할은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와 같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딘가에 진짜 살아 있는 인물을 만난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김형서 배우는 가수 비비로서 선 무대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볼 때부터 언젠가 연기를 해도 될 것 같은 에너지를 가진 분이라 생각했다.

- 영화의 배경은 ‘명안시’,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실제 있는 공간처럼 빼곡한 디테일로 구현돼 있다.

= 건물이건 땅이건 주변 환경이건 단 한구석도 새로운 것이 있으면 안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갑갑함과 피폐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다. 이런 감정을 시각 화해서 관객 또한 함께 감각하게 만들기 위해 도시를 이루는 모든 것을 ‘고인물’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일례로 연규의 집은 층고가 낮고 폭은 좁은데 긴 기형적인 형태다. 벗어날 수 없는 폐쇄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치건의 사무실 역시 건물 뒤에 공터와 차고가 있어 닫혀 있는 느낌이 든다. 오래된 공간이라는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실제 버려진 다방을 찾아내 촬영했다.

- 명안, 연규, 치건, 하얀 같은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 명안은 한자로 ‘어두울 명, 구덩이 안’ 자를 써서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느낌을 담았다. 하얀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빛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매우 명확하게 지어진 이름이다. 연규는 어감으로 접근했다. ‘연’은 연약한 느낌이지만 ‘규’의 된소리는 이후 연규가 맞이하는 변화를 연상시킨다. 치건의 거친 어감은 직관적으로 떠올렸다.

- ‘아버지와 아들’의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라든지 어른들의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이야기는 사실 한국영화에서 많이 반복된 소재다. 이 테마가 진부하게 보이지 않게끔 감독만의 새로운 시각을 녹여내기 위해 어떤 고민이 있었나.

= 단순히 폭력적인 환경에 놓인 인물의 상황을 그리기보다는 그러한 상황이 어떠한 파국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또 한 인물의 과거와 미래를 각기 치건과 연규 캐릭터를 통해 마치 거울처럼 구현해 한편의 영화에 담고 싶었다. 같은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에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투영한다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 폭력의 수위가 만만찮다. 언론배급 시사회 때도 여기저기서 힘들어하는 기자들이 속출했다.

= <화란>은 폭력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폭력이 등장하는 건 불가피하다. 그래서 장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가정 폭력은 무척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사운드나 연규의 엄마 모경의 반응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인물의 정서에 좀더 집중하려 했다.

- 후반부에 하얀이 자진해서 치건의 인질이 되는 장면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 환경적 요인이 얼마나 큰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려면 연규의 위태로운 선택이 연규와 관련된 모든 환경에 영향을 미쳐야만 했다. 때문에 치건뿐만 아니라 하얀이나 연규의 가정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필요했다. 또 연규와 치건은 사실 영화적으로 동일한 인물인데 극명하게 다른 결말을 맞는 이유를 보여 줘야 했다. 하얀은 연규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호자이며, 치건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다. 하얀의 선택을 연규가 목도하는 순간 오히려 능동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연규는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다.

- 원래 세 가지 버전의 결말이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의 엔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예전엔 치건이 지금보다 더 서늘한 캐릭터였다. 연규와 치건의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하얀이 사고로 죽고, 치건이 술에서 깬 뒤 자신이 연규의 아빠 정덕과 똑같은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한다. 그 순간 연규 역시 괴물이 되어 치건을 공격하고, 아버지도 죽인다는 버전이 있었다. 하얀은 살아 있지만 하얀 앞에서 연규가 정덕을 죽이는 결말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지금의 엔딩이다. 연규는 폭력적인 환경에 휩쓸려서 자기 본성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세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규의 선택으로 인해 파국이 벌어지지만 동시에 연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연규가 겪은 모든 사건은 결국 그의 성장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조금 다른 선택을 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암울했지만 연규의 남은 삶에 자그마한 빛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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