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어휘를 경계하고, 진심이 아닌 걸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들은 자주 세계와 대치하기 마련이다.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그런 인물이 두명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녀 사이다. 둘은 세상과 싸우는 동시에 그 고통의 현장을 보이느라 서로에게도 많은 상처를 입혔다. 영화는 젊은 여성인 채영이 일대일 상담에 참여하는 걸 보여주며 시작한다. “내가 잘했어”라는 말을 하라고 요청받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는 이 상황이 불편해 보인다. 대신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사이사이, 내레이션과 그림일기 장면을 통해 그는 10대 때부터 겪었던 자신의 내밀한 욕구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채영은 15살, 극단적인 식사 거부로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거식증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곧 폭식증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채영의 불안정한 나날들을 지켜보며 엄마인 상옥 또한 괴로웠다.
한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했던 상옥은 다른 아이들의 주변을 지키느라 정작 채영의 곁에는 없는 일이 잦았다. 상옥은 학교에서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한편 당시 가정에는 부재했던 스스로에게 복잡한 감정이 든다. 어느덧 20대 중반이 된 채영은 요리로 커리어를 쌓기 위해 호주로 이주하고, 상옥은 새로운 미래로 도전하는 딸을 응원하기로 한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두 모녀를 오가며 애증의 관계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연대와 불화의 방식을 탐구한다. 우울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여성 사이에는 채영의 외할머니이자 상옥의 어머니에 관한 일화까지 겹치면서, 대를 이으며 공존했던 여성들이 뒤틀리게 교접하는 방식을 담는다. 오래전 TV다큐멘터리 방송에 출연한 적 있던 모녀의 과거 얼굴들이 삽입되어 이들의 전사를 보충하는 동시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모습이 지금-여기라는 감각을 생생하게 붙든다.
음식을 올려두는 가구이자 식사를 하는 공간, 때때로 격식 차린 예절이 요구되는 장소이며 무엇보다 상대방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자리인 식탁. 이 앞에서 이들은 무엇을 같이 먹고, 또 어떤 재료에 관한 기억을 더듬을까. 전작 <피의 연대기>에서 여성의 생리를 전면적으로 다루며 피에 관해 방대한 기록을 조망했던 김보람 감독은 한 집안의 모녀로 시선을 좁히되 한층 배율을 높였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서는 여성이 스스로의 몸과 대립하고 또 화해하는 과정, 여성이 다른 여성을 바라보고 (몰)이해하는 방식 등 두 모녀의 존재만으로도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아플 수도 있지.”
채영이 호주로 떠나는 날 아침, 모녀는 서로를 껴안고 말한다. 엄마는 딸이 절대 아프지 않길 바라고, 딸은 언제든 아플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CHECK POINT
<호랑이와 소> 감독 김승희, 2019단편애니메이션 <호랑이와 소>에서 김승희 감독은 부모가 일찍 이혼해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지난 시간을 회고한다. 제목은 엄마와 딸의 띠를 가리키는데, 이 동물들은 공교롭게도 이 모녀의 정체성이 되었다. 홀로 집안을 이끌어야 했던 여성과 그 여성을 비롯해 주변에 부응하며 강해져야 했던 또 다른 여성이 있다. 연필로 그린 울퉁불퉁한 호랑이와 소는 다른 듯 닮았고, 반목하는 듯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