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를 보거나 들으려 하기에 앞서 이해부터 하려고 들 때 생겨나는 오해들이 있다. 이러한 오해들이 예비된 함정에 대하여 누구도(어쩌면 홍상수 그 자신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홍상수는 그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뒤바꿔놓는다.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홍의주(기주봉)가 함께 대화하던 배우 지망생에게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 맞냐며 질문을 되풀이할 때, 이 대사는 술을 마시기도 전부터 부리는 주정이 아니라 그러한 매혹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기 두개의 하루가 있다. 하나는 시인 홍의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배우 상원(김민희)의 것이다. 혼자 사는 홍의주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대화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낯선 사람과 잠시 함께 살게 된 상원은 또 다른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역시 그들과 대화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영화는 각각의 하루를 그 안에 속한 인물들 각자의 행위와 제스처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인물들의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는 떨어져 있는 두개의 시간을 하나의 시간으로 확정할 근거가 없다. 이 시간들이 ‘우리의 하루’로 호명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관련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두며 영화가 우리의 이해 또는 오해를 (제목에서부터 얼마간)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행위가 반복되고 어긋나기도 하며 거의 동일한 어떤 것이 되어 겹치기도 할 때, 좌표 안에서 무수히 가능한 관계항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두개의 시간 역시 어느 하나의 고정점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에는 숨겨진 또 하나의 시간이 있다. 상원이 머무는 집에서 사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는지 집을 나가버린다. 우리는 그의 시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므로 영화에는 적어도 네개의 하루가 있다. 상원의 하루, 홍의주의 하루, 상원과 홍의주의 하루, 그리고 ‘우리’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