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는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라다. 해적이자 선장, 비행사이자 할머니인 도라는 배짱과 기세와 낭만을 갖췄다. 멍청한 해적 아들들을 거느린 도라가 양 갈래 머리를 휘날리며 박력 있게 등장했을 때, 선실에 걸린 액자 속 젊은 시절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해적 선장 할머니를 본 적이 없어서였겠지. 구름의 영화라고도 부를 만한 <천공의 성 라퓨타>는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즈키 도시오,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이후 세상에 공개한 첫 작품이다.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꿈과 환상과 추억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소식은 영화 팬들에게는 슬픈 이별 통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그간 은퇴를 번복해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진짜 은퇴작이 될지도 모르는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세계, 화재로 엄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엄마의 고향에서 새엄마(엄마의 동생)와 살게 된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낯선 공간에서 새 가족을 맞게 된 소년은 외톨이가 된 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다 말하는 왜가리를 만나고, 저택 인근의 오래된 탑을 발견하고, 사라진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신비한 탑을 통해 이세계로 향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인간과 동물과 자연은 한몸처럼 뒤섞이고, 현실과 판타지는 교차한다. 이보다 더 심플할 수 없지만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와라와라’와 같은 신스틸러 캐릭터가 등장하고,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일곱 난쟁이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할머니들이 등장하고, 전쟁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의지도 표명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장들은 이번에도 반복되는데 그림과 표현은 더욱 아름다워졌고 감정의 전달은 꽤 담백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세계의 창조주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세계를 물려주려 한다. 악의로 물들지 않은 너만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마히토가 아닌 큰할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 나도 이제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구나. 언제나처럼 이상한 점프컷 연결이지만, 이번이 <씨네21>에서의 마지막 마감이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은퇴를 번복하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두고 반쯤 농담으로 “거짓말쟁이”라 했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면서도 계속 함께 여정을 걸어왔다.” 이 말에 담긴 뜨거운 감정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80대의 거장도 창작의 고통은 피해갈 수 없었고 마감을 앞두고 “집중이 안돼. 아직 리듬을 못 찾고 있어”라든지 “고통, 고통, 정말이지 고통이구나!”라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하니 그가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15년을 몸담은 <씨네21>에서 미우나 고우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회를 배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몫의 글을 책임져야 하는 태도를 배웠다. 마지막 회의, 마지막 마감, 마지막 식사, 마지막 인사,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곳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너무나 황송한 말들을 듣고 떠난다. 안녕, 뜨겁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