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픈 더 도어>가 시작할 때 나타나는 ‘제작자 송은이’라는 자막이 눈에 띈다. 제작자로서 <오픈 더 도어>의 어떤 점을 가장 눈여겨봤나.
송은이 요즘 영화시장이 상당히 침체돼 있다. 하지만 이럴수록 움츠러들기보다 다양성 영화가 많이 나와야 시장 전체가 살아날 수 있다. 하루는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 극장에 올라오는 영화 대부분이 성공 공식을 따르고 있다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오픈 더 도어>는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가진 본질적인 즐거움에 충실한 작품이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 무수한 C(choice)를 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오픈 더 도어>는 계속해서 문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 그 문을 연 다음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묻는다.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고, 관객들이 가볍게 생각하고 상상할 거리를 던져준다.
- 다양성 영화로서 <오픈 더 도어>가 컨텐츠랩 비보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나.
송은이 컨텐츠랩 비보는 기성 방송에서 벗어나 우리가 그만두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는 방송국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정통의 방식으로 큰 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서 작은 물꼬를 터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컨텐츠랩 비보의 지향점이 그렇고, <오픈 더 도어>가 현실을 비틀어내는 방식이 그렇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작품이 컨텐츠랩 비보의 첫 영화인 것도 의미가 있다. 가끔은 광화문에 작은 영화관이 빼곡하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작은 규모의 다양한 영화들이 정기적으로 상영됐다. 그 시절을 향수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를 기다리는 세대 모두에게 <오픈 더 도어>가 좋은 시도가 될 거라 믿는다.
이순원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정말 큰 사람이다. 영화적 지식과 견해가 무척 깊다.
김수진 오늘 기자간담회에서 제작자 송은이의 도전에 관한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어떤 점에서는 일면 이해가는 질문들이었다. 컨텐츠랩 비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오픈 더 도어> 제작이 갑자기 시작된 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컨텐츠랩 비보에는 영화 제작을 전문으로 해온 PD가 두명이나 있고 그외에도 유관 전공 전문 인력이 자리하고 있다. 몇년 전부터 영화 제작을 차근히 준비해왔다는 의미다. 송은이 대표가 제작자로서 날렵한 눈으로 명확하게 결정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느라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꼭 짚고 싶다.
송은이 사실 나는 마케팅 때문에 함께 나오는 거다. (웃음) 현실이 그렇지 않나. 하지만 제작자는 제작까지만 작품에 관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극장에 오기까지 내가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자리든 함께할 의지가 있지만, 중요한 건 내가 아니다. 관객들이 작품을, 그리고 작품 속 배우들을 봐주면 좋겠다.
- <오픈 더 도어>는 처음 단편으로 시작했다가 다섯개의 챕터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겼나.
송은이 원래 시나리오에는 매형 문석과 처남 치훈의 감정적 격돌이 드러나는 챕터1까지만 담겨 있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더라. 챕터1은 인물의 대사를 통해 주요 사건이 드러나는데, 관객들이 상상한 것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자는 방향으로 논의하면서 챕터를 더 늘려가게 됐다.
이순원 장항준 감독이 <리바운드> 촬영을 앞둔 시점이어서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근데 너무 신기하게도 단 며칠 만에 시나리오를 더 늘려왔다. 이야기도 탄탄했다. 정말 장항준 감독은 이야기꾼이다. 첫 대본을 받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라 신기했다.
김수진 나는 단편에서 가족사진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소품 촬영을 진행했는데 그로부터 3~4일 뒤에 대본이 왔더라. 나도 놀랐다. (웃음)
송은이 분량이 늘어난 만큼 미국 가정집을 섭외하기 위해 로케이션 조사도 진행했다. 정말 많은 곳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워낙 디테일한 장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 없어서 세트를 직접 지었다.
- 영화에 등장하는 세탁소, 가정집 등을 모두 세트로 지은 것인가.
이순원 다 지은 거다. 가정집은 당진에 있었고 세탁소는 양평 휴게소에 있었다. 미술팀이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한국에서 미국을 재현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송은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지은 거다. 사실 우리 제작팀도 치열하게 고민했다. 갑자기 늘어난 예산에 손익을 계산하고, 업무 진행의 필요성을 따져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선의로만, 혹은 친분으로만 이뤄진 게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친하기 때문에 ‘말도 안되니까 당장 때려쳐!’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작업에 실제로 너무나 필요한 몫이었다.
김수진 <오픈 더 도어> 촬영은 총 7회차로 이뤄졌다. 그중 가족 구성원들이 부딪히는 장면은 3일에 걸쳐 찍었다. 모든 배우의 다른 스케줄이 살짝 겹친 상태였기 때문에 촬영이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다른 작품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모였을 때 밀도 있게 촬영했다. 워낙 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원활하게 진행됐다.
- 시선을 끊지 않는 원테이크 촬영 방식은 짤막하게 분배된 여러 챕터를 스릴 있게 몰아세운다. 이 과정은 어땠나.
김수진 윤주는 인물 자체가 심신미약 상태다. 처음부터 고양된 상태로 한번에 밀고 나가야 한다. 대본을 보는데 ‘어머, 이거 자칫하면 원테이크로 갈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게 맞았다. (웃음) 대본 전체의 흐름을 가져가되 정확한 동선을 구현해야만 했다. 12~14분 정도의 분량이라 원테이크 시간이 그리 짧지 않았다. 조명, 스테디캠 등 다양한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면서 합을 맞췄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내가 정말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까?’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장항준 감독님이 나를 많이 믿어준 것 같다. 내게 자율성을 많이 주기도 했고. 그렇지만 따뜻한 믿음과 별개로 너무 무서웠다. 원테이크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이순원 <오픈 더 도어> 출연배우들이 공통적으로 연극 무대를 거쳐왔다. 김수진 배우가 부담스러웠다고 하지만 촬영할 때는 모두 프로답게 진행했다. 연극의 긴 호흡, 정확한 위치 선정, 동선 맞추기 등 이전 경험이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송은이 나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현장을 찾았다. 다들 정말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몰입하더라. 눈빛이 반짝하고 바뀌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김수진 촬영장에서 계속 “영화 이렇게 찍는 거 맞아?” 했잖아! (웃음)
송은이 그거 농담이잖아! (웃음) 워낙 일정이 짧아서 즉흥적으로 촬영하게 될 때 장난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촬영 과정을 거쳤으면 지금과 같은 재미와 인물간의 케미스트리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다.
- 원테이크 촬영 과정 중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있다면.
김수진 거의 다 왔는데 숨어 있던 스탭 한명이 프레임 안에 들어온 순간이 있었다. 그때 모든 스탭이 한꺼번에 소리지르면서 난리 난리 생난리가 났었다. (웃음)
송은이 차라리 일찍 발견됐으면 나은데!김수진 근데 또 참 기분이 이상하더라. 스탭과 배우가 이렇게까지 혼연일체되는 경험은 흔치 않다. 무대 중심에 서는 배우로서 무척 고무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 극장에서 2시간 이하의 영화를 찾기 어려운 요즘, <오픈 더 도어>의 상영시간은 71분이다. 다소 파격적인 결정인데.
송은이 영화의 성공 공식에 비춰보자면 말도 안되는 결정일 수 있다. 파격적인 게 맞다. 하지만 꼭 긴 상영시간이 영화의 재미를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픈 더 도어>는 짧고 임팩트 있는 구성이 중요한 영화다. 만약 불안함에 무작정 러닝타임을 120분으로 늘렸다면 그건 이 작품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관객들이 밀도감 있게 몰아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실 이러한 맥락은 지금까지도 TV프로그램이 60분 이상 편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송사의 입장과 비슷하다.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는 15~20분짜리 분량에도 압축된 재미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많은 시청자들이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방송국은 60분이 되어야 광고가 붙는다는 현실 때문에 시청자의 흐름을 놓치는 면이 있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돈 내고 보는 영화인데 2시간은 넘어야 하지 않겠어?”라는 보상적 측면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 또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물론 제작팀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느꼈던 그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자는 쪽으로 방향을 견고하게 잡았다. 그게 우리의 결정이었다.
- <오픈 더 도어>에서 인물간의 대립으로 스릴감을 높인 건 첫 번째 챕터다. 매형과 처남의 일촉즉발 상황을 보여주는데, 두 배우의 합이 중요했을 듯하다.
이순원 이 장면은 장항준 감독님의 계획이 명확했다.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결정적인 비밀을 토로하기 전까지 치훈과 문석의 감정이 많이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감정적 낙차가 클수록 긴장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서영주 배우와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더라면 미세한 고양감을 드러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 실제로 음주를 했다.
서영주 맥주 한두잔씩 하면서 치훈의 감정과 상태를 잘 드러내려고 했다. 술을 마시고 찍고, 또 마시고 찍으면서 술에 취해가는 정도를 맞춰나갔다. 물론 업무를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가능한 정도로만 마셨다.
이순원 장 감독님이 많이 열어주셨다. 음주 아이디어를 제안했더니 “괜찮겠어?” 하면서 받아주셨다. 어쨌든 주어진 시간 안에 진짜 가족 같은 친한 무드를 보여주기 위한 방안으로도 괜찮았던 것 같다.
서영주 술 취한 연기가 정말 어렵다. 한끗 차이로 몰입도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순원 배우가 촬영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주었고 서사적으로 강렬한 이야기가 쏟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있었다.
- 매 챕터는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중요한 기로를 보여준다. 장항준 감독은 ‘문’을 여는 것을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누군가는 망설이고, 또 누군가는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간다.
이순원 두번의 기로를 맞이하는 문석은 결심의 순간을 눈빛 전환으로 드러내야 했다. 장항준 감독은 내게 절제를 많이 요구했다. 화면에 담겼을 때 갈등이 너무 과잉돼 보이지 않도록, 현실성 담긴 흔들림을 만들자고 하셨다.
서영주 반대로 나에겐 더 드러내라고 하셨다. 내가 너무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덜 그려냈던 걸까. (웃음) 눈을 통한 감정 전환과 감정 표현을 더 크게 내보이라고 하셨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송은이 아, 그 장면.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상상했던 대로 구현됐던 장면이다.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오른, 팽팽한 풍선을 보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그 끝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스릴러라면 칼, 피, 죽음 같은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마련인데 <오픈 더 도어>는 관객이 스스로 선택하여 상상하는 방식을 택한다. 장항준 감독 특유의 절제이기도 하다. 사실 익숙하고 쉬운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관객을 더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수진 결국 챕터 사이마다 암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인물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에 따른 어떤 책임을 지게 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는 챕터에 간격을 두어 관객이 스스로 사유할 여지를 준다.
- 컨텐츠랩 비보는 <오픈 더 도어> 제작과 배급을 기점으로 활동 반경을 영화로 더 넓혀갈 예정인가.
송은이 맞다. 다양한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플랫폼의 경계가 많이 무너졌다. 드라마와 예능을 TV에서만 보지 않고 무수히 많은 영화도 OTT를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모든 게 내 손에 들린 화면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왔지만, 그래도 영화는 극장에서 보면 좋겠다. 암전되는 순간의 설렘, 사운드와 커다란 스크린. 연극의 3요소처럼 영화의 3요소를 개인적으로 꼽아본다면 이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가 진짜 영화의 맛이지 않을까. 컨텐츠랩 비보도 이름이 ‘랩’(lab)인 이유가 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실험실을 꾸리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 동참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탄탄한 로드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수진 <오픈 더 도어> 촬영 과정은 내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배우와 스탭 모두 자율권을 갖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체력적으로 힘들어했지만. (웃음) 하루는 내가 컨텐츠랩 비보팀과 함께 영화 찍는다고 하니 다른 스탭들이 “거기 어때요? 저도 너무 같이해보고 싶어요” 하더라. 모두가 이곳을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송은이 특히 장항준 감독의 스타일이 그렇다.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현장에 있는 모두가 즐겁길 바란다는 면에서 나와 결이 같다. 물론 우리 감독님이 조금 덜 가벼우면 좋겠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