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의 중앙에 서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양옆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주인공은 돋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주인공이라 여기고, 주인공이 아님에 좌절하며,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타짜>의 곽철용(김응수)이 잘난 놈 제치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잡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인 이유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최익현(최민식)이 남천동에서 느그 서장과 함께 밥도 먹고 사우나를 한 이유도… 모두 ‘센터 욕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했기에 발생한 일인 것이다.
‘센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통한 <프로듀스 101>을 생각해보라. 센터는 그 자체로 우승자의 특전이었다. 노래를 제일 잘 부르면 ‘메인 보컬’이 되고, 춤을 제일 잘 추면 ‘메인 댄서’가 된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모난 데가 없으면 ‘리더’가 된다. 얼마나 합리적인 역할 분담인가? ‘매력’과 ‘인기’라는 모호한 기준이 작용하는 것은 오직 센터를 결정할 때만이다. 센터는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도, 못해서도 안된다. 외모도 마찬가지다. 너무 뛰어나면 그냥 ‘비주얼 멤버’ 같은 게 된다. 센터는 적당한 크기의 육각형을 지닌 상태에서 대중으로부터 호감 이상의 마음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 마음은 사랑이나 연민보다 추앙에 가까워야 세가 커진다. 결국 아이돌 그룹의 센터란 실력, 외모, 인성에 더해 교주의 자질과 정치인의 술책을 겸비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부패한 방송국 프로듀서가 자기 멋대로 투표 결과를 조작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센터들은 주로 킬링 파트를 담당한다. 예외도 많지만 대개 킬링 파트를 소화하는 멤버가 그 곡과 무대의 센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원더걸스 <Tell Me>는 ‘어머나’ 단 세 음절로 시간을 멈추던 소희의 노래였고,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는 티파니의 ‘DJ PUT IT BACK ON!’이 있었기에 불후의 명곡일 수 있었다. K팝의 음악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자신의 몫을 킬링 파트로 만들어 곡의 센터가 되는 개척형도 있다. 인피니트 성열이 공허한 기운으로 부르는 ‘Do You Hear Me’나 위너의 진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부르는 ‘널 좋아해’, 트와이스 사나의 저 세상 비음이 돋보이는 ‘친구를 만나느라 샤샤샤’는 나에겐 너무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그 노래의 전주만 접해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의 얼굴’이 되었다.
센터가 되고 싶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아보아요’ , ‘내 세상의 중심은 나야’ 같은 자기 최면이 아니라, 정말 세상의 중심에 내 몸뚱이를 옮겨다놓고 싶은 노골적인 욕망이었다. 지방에서 태어난 것은 저주였다. 한반도가 사람의 신체라면 나의 고향은 뇌나 심장이 아닌 방광 부근에 있었다. 방광은 무척 중요한 장기이지만 우리의 영혼과 가장 멀리 위치하는 듯하다…. 누구도 ‘방광이 뛴다’라거나 ‘뜨겁게 방광을 울리는’ 따위의 표현을 쓰지 않는 것처럼. 서울이라는 심장에 산다는 건 센터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데, 그렇다면 나는 기본 미달이었다. 전제를 마련하기 위해 일단 ‘서울에 가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정착할지. 그런 것은 일단 좌표부터 옮긴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돈이 생길 때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좌석에 앉아 ‘우리가 남이 아닌’ 지역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였다. 충청도를 지날 땐 나와 속도가 다른 사람들의 말씨를 들으며 가슴이 설렜고, 경기도를 지날 땐 ‘여기만 살았어도 얼마나 좋을까’ 하며 신도시의 꿈 같은 삶을 그렸다. 광명역을 끝으로 열차는 서울에 입성한다. 구로, 영등포, 노량진… 풍경이 지저분하고 심란할수록 서울이란 도시의 황홀함은 깊어졌다. 어느 구간에 이르면 열차는 삐걱대는 쇳소리를 내고 천천히 달렸다. 그것은 이제 곧 서울이 한강이라는 그곳의 킬링 파트를 보여줄 거라는 신호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교각, 강변에 줄을 선 비싼 아파트와 고층 빌딩, 강줄기의 모양대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끝없는 행렬…. 아, 사람은 이런 것을 보기 위해 사는 것이구나! 어째서 나의 조상들은 대대로 산골 오지에 터를 잡은 것인가? 괘씸하고 막돼먹은 감정을 싣고 열차는 강의 대동맥을 따라 심장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용산, 서울역, 광화문…. 우심실, 판막, 좌심방…. 서울이라는 아주 오래된 심장은 쉬지 않고 새로운 피를 공급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숨고 드러나기를 반복하면서 호흡을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서울로 뛰어들었다. 얼마간은 정말 숨이 가쁠 정도로 행복했다. 월세 50만원, 전세 보증금 5천만원, 평당 1억원, 로열층 30억원의 전단지를 보며 하염없이 걸어도, 내 동네와 옆 동네의 틈에 고여 있는 이상한 경멸을 느껴도, 약하면 약할수록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비정한 구조를 체험해도. 나는 그것이 서울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센터로 사는 데 그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AOA의 <심쿵해>는 내가 서울에 정착한 지 딱 10주년이 되는 2015년에 발매되었다. 노래는 충격적이었다. <심쿵해>는 여자의 마음을 연구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만으론 절대 탄생할 수 없는 노래였다. 나는 확신했다. ‘남자’를 상상하고 욕망하다 한껏 상기된 ‘여자’의 어떤 순간을 직접 겪지 않고는 이런 노래를 쓸 수가 없다고. 그래서 이 노래의 작곡과 작사를 맡은 것이 ‘용감한형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아찔한 반전의 맛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사운드와 말초적인 표현으로만 이루어진 노랫말은 상대를 유혹하며 기꺼이 타락하고 싶은 순간을 깊숙이 구현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며 배가 간지러워지는 그 설렘과 떨림이 곡의 모든 구간에 팔팔 끓었다.
<심쿵해>의 킬링 파트를 가려내는 것은 K팝 팬들 사이의 오랜 난제다. 이 곡은 모든 부분이 킬링 파트이며, 모든 멤버가 센터다. 몸의 중심인 ‘심장’에 대해 노래하면서, 그 중심을 골고루 배분한 초월적인 구성인 셈이다. 이 노래의 형태가 나의 ‘서울 콤플렉스’를 말랑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니 어디가 중심인지 알 방도가 없고, 모든 구간을 킬링 파트로 만드니 센터 같은 건 누가 맡든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래. 역시 지방 차별과 지역 갈등에 대한 해답은 서울을 점점 확장해서 전국 모든 지역을 서울로 만드는 것뿐이다! 해괴한 결론에 다다를 때쯤 노래가 ‘너는 대체 걔가 뭐가 그리 좋아?’ 하고 질문했다. ‘첫눈에 확 반해’버린 서울의 ‘넓고 날렵한’ 외관을 이야기해야 할까? ‘내가 미쳤나봐’ 되뇌면서도 ‘아등바등’대며 이곳에 살았던 이유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서울을 떠날 채비를 하다 보니 지난 내 마음이 궁금해졌다. 이곳에서의 삶은 줄곧 콤플렉스와 싸우는 일이었는데 더는 센터가 되고 싶은 욕심도, 미련도 없는 나는 끝내 그 원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나는 죽여주는 파트를 만들 수 있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다시 나의 아늑한 방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