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후반부, 나츠코를 찾아 탑 안의 세계로 떠나온 마히토는 마침내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가 잠들어 있는 산실에 도착한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깨워 데려가려 하지만 눈을 엘 듯 춤을 추는 종잇조각이 둘의 접촉을 가로막고, “나츠코 엄마!”라고 외친 마히토는 의식을 잃는다. 종잇조각의 우윳빛 색감이 산실의 적막한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상실하던 도입부의 장면과 포개어지며 시적 서정을 새기고 간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작화의 매혹을 잠시 차치하고 곱씹어본다면 이 장면의 감흥은 얼마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마히토는 이세계에 잠입하기 전까지 별다른 접점도 없던 나츠코를 왜 돌연 엄마라고 부르는 걸까? 마찬가지 이유로 마히토에게 별 감정이 없을 나츠코는 왜 그의 애절한 외침에 “너 같은 건 정말 싫어!”라고 쏘아붙이는 걸까? 마히토가 탑에 잠입하기 전까지인 1부의 세계에서 가족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격리돼 있던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이 격정적인 감정은 쓰라리다기보다 당황스럽지 않은가.
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난해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데 기여했을 여러 기묘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결론부터 당겨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본 편이며, 앞에서 언급한 장면의 이물감이 의도적인 효과였다고 보는 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영화의 공간과 정서에 스며든 이물감을 시종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부조리한 뉘앙스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키리코가 마히토에게 여행의 이유를 물으며 “나츠코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할 때, 잠시 주저한 마히토가 “제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히토와 나츠코 사이에 정서적 연결고리가 희미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설하면서 산실 장면의 격정적 몸짓에 의문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산업에 종사한다는 지엽적 사실을 영화 전체에 대한 비판적 논거로 삼는 견해나, 몇몇 대사를 근거로 영화가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다는 식의 상찬 모두가 불충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주장은 영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왜곡과 자기 훼손의 뉘앙스를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짧게나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통하는 매혹적인 이물감에 깃든 조형의 원리를 말하고 자 한다. 하지만 다분히 전적인 성격이 있는 이 영화의 왜곡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영화를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작업이 불가결하다고 느낀다. 잠시 우회하며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양식화한 세계의 특징적 미학을 검토하도록 하자.
우정 어린 동작의 소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서로 무관하거나 적대하는 인물들이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기묘한 친교의 순간이 존재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에게 저주를 건 원흉인 황야의 마녀는 설리번으로부터 도피하는 과정에서 소피 일행과 잠시 동행하더니 성의 구성원으로 천연덕스럽게 편입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구직 요청을 성가셔하던 가마 할아범은 몇 장면 뒤 린에게 치히로가 본인의 손녀라는 돌연한 거짓말을 하며 치히로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뇨와 소스케처럼 아기자기하게 꿈틀거리는 성장기의 아이들이 있다. 서로 초면이거나 적대하는 인물은 때로 역동적으로 흐르는 자연물로, 때로 오래된 괘종시계처럼 아늑한 질감으로 수놓인 시공간 안에서 잠시 부대낀 후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관계로 거듭난다. 마치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토토로와 빗방울을 맞는 것처럼, 사건의 의미값은 0으로 수렴하지만 그렇기에 현대적 타산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일상적이고 우정어린 몸짓들. 놀이터의 아이들이 어울리는 데 통성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듯, 이 꾸밈없이 자유로운 우정의 성립에 거창한 해석의 사족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판타지의 거장이지만, 그 판타지의 개연적 질감을 지탱하는 사소한 생활 감각의 묘사에 충실하다는 측면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와 자크 드미에 뒤지지 않는 일상의 대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라면, 티격태격하던 마히토와 왜가리가 입천장을 메꾸는 공작 활동 후 가까워지는 장면이 이같은 친교의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면은 이런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이질적이다. 마히토는 학교에서 고립을 선택하며, 집에서는 부모와 분리된 사적 공간에서 독서와 같은 내면적 활동에 침잠한다. 인상 깊은 장면 하나. 마히토는 퇴근한 아버지가 나츠코와 입맞추는 광경을 보지만, 그 입맞춤은 1층 반자를 통해 마히토의 시야에서 가려져 은밀한 성애의 뉘앙스를 배가한다. 같은 공간에서 뒤엉키던 캐릭터의 집단적 활력이 만개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과 달리, 마히토의 집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분절하며 개별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성인의 활동을 담아낸다. 이런 단절의 증상은 시공간적 비약과 폐쇄적 공간감각을 징후로 드러내는 이세계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키리코의 말처럼, 죽음의 기운만이 만연한 세계다. 요컨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 특징적이었던 우정 어린 동작의 소멸을 드러내는 영화다. 그리고 이는 줄곧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근심해왔던 그가 작품을 만들며 새롭게 직시한 동시대에의 관찰을 투영한 결과일 것이다. 우정의 몸짓이 이념이나 가치의 동일성과 무관하게, 서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다는 무심한 공존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그런 몸짓이 사치가 된 세계를 살고 있다. 노년의 인물조차 아이처럼 약동하던 미야자키의 전작 속 군상과 달리, 오늘날 우리는 각자의 방 안에 흩어져 육체적 실감이 거세된 디지털 신호를 주고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추상의 세계를 빚을 때조차 그려진 동작이 사실적 세계의 관찰에 기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예술가였고, 그런 그에게 오늘날의 파편화된 현실로부터 우정의 몸짓을 빚어내는 작업은 어렵고도 기만적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은 미야자키뿐 아니라 다수의 현대적 작가가 공유하는 곤경이기에, 올해만 해도 <더 웨일>과 <어파이어>처럼 외부 세계와 단절된 예술가의 자기 파괴적 초상을 다룬 작품은 빈번하게 발견됐다.
각별히 그 단절의 기운이, 삼킨다는 동작의 전략적 변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미야자키는 삼킨다는 몸짓을 누구보다도 역동적으로 묘사한 작가다. 본 작품에서 자신의 머리를 삼키는 왜가리, 하울의 성을 움직이며 소피의 요리를 삼키는 캘시퍼는 물론, 미야자키의 영화에 빈번한 식사 장면은 삼키는 몸짓의 동사적 활력을 애니메이션만의 매혹적 질감으로 구현한다. 애니메이션은 타자와 세계의 미세한 인상을 즉물적으로 포착하는 사진적 이미지와 달리, 예술가의 손길에 의한 조작의 여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예술이다. 이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피사체의 순수한 시간적 지속을 응시하기보다는, 형태의 자의적 가소성을 담는 데 유용한 분과다. 미야자키의 특징은 이 가소성을 식사의 활동과 연관시키며 삼키는 몸짓의 물질성을 극대화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똑같이 식사 장면을 일상적 의례로 활용한다고 해도 그 의례를 수행하는 인물의 미세한 동작에 주안점을 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지적처럼 인물들이 먹는 음식을 보여주지 않지만, 미야자키는 삼키는 활동을 과장된 양감으로 부각하곤 한다. 앞서 언급한 미야자키의 일상성은 식사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주목할 점은 공동체의 식사가 우정을 강화하는 것과 달리 타인과 식탁을 공유하지 않는 식욕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제니바의 도장을 몰래 삼켜 저주에 걸린 하쿠, 과식을 통해 온천장의 질서를 파괴하는 가오나시, 주인이 부재한 식당에서 음식을 삼켜 돼지로 변신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삼킨다는 활동이 타자와 동석하는 식탁과 분리된 채 이뤄졌을 때 저주를 동반한다는 규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강의 신의 유동적인 몸에 삼켜지는 치히로가 과식의 소화물을 토해내게 하는 경단을 받고,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가 데이다라봇치의 액체에 삼켜질 때 비로소 육체에 각인된 저주의 날인이 지워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삼켜진다’는 현상은 미야자키가 문명의 파괴적 활동으로 은유한 과식의 활동을 피동형으로 전복함으로써 바람과 물로 표상되는 자연의 타자성을 수용하게 하는 환경적 치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세계가 미야자키의 공간치고 전에 없이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캐릭터들의 식욕이 식탁이라는 공동체의 장소를 결락한다는 점과 유관할 것이다. 마히토는 수직의 벡터로 뻗어 있어 식탁이라는 수평적 가구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폐쇄적인 미로를 헤매며, 펠리컨과 앵무새는 통제 불능의 식탐을 앞세우며 습격을 감행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장은 고유명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현대적 노동에 대한 은유적 공간이었음에도(온천을 운영하는 유바바에 지브리를 운영하는 스즈키 도시오와 본인을 투영했다는 미야자키의 말처럼) 공동체의 질서와 구성원의 온기가 움트는 장소였다. 가오나시처럼 파괴적인 식탐을 지닌 군상만이 도사린 여기에는 그런 온기가 없다. 그런 파괴적 몸짓 또한 생태계의 순환고리가 단절된 데서 비롯한 불가피한 생존 활동이라는 펠리컨의 말은, 이 비극이 개별적 욕망을 넘어선 거시적 무질서의 효과임을 지시한다. 그런데 미야자키는 그 일그러진 세계에 친숙한 지브리적 도상을 채워 넣는 한편 키리코와 히미처럼 마히토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지의 존재 또한 투입함으로써 세계의 인상을 이중화한다. 향수 어린 기호로 가득하지만 위태롭게 쌓아올린 13개의 돌조각처럼 불안정하기 그지없어 회한의 실감조차 낭만의 정서를 머금지 못하는 세계. 그 분열증이야말로 현실의 활력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는 데 실패해 익숙한 기호만을 재조합해야 하는 예술가의 운명에 관한 성찰의 결과다. 그것은 또한 나츠코의 산실에서 벌어지는 재회가 기묘한 이물감을 내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몰락과 미국의 걸프전 공습을 계기로 정치적 이상주의를 버렸다고 고백한 미야자키는 현대 도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에 대한 구상을 폐기한 후 거만한 미국 청년과 대결하는 “붉은 돼지”의 이야기를 만든 바 있다. 거기에는 중년적 비애감과 자기모순에 대한 성찰이 쓰라리게 배어 있었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분열증은 보다 각별한 위상을 지니는 것 같다. 그 증상이 개별적 인물의 심경을 넘어 영화 전체를 감싸 안은 형식적 구조로까지 번져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관객이 그 난해함에 반감을 표할 때 나는 단단한 일상적 질감을 형성하지는 못하되 현란한 색채로 흩어지는 기호들의 임시적 매혹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 분열의 리듬이야말로 식탁에 마주 앉는 우정이 소멸한 시대, 환상조차 피안의 위로를 제공하지 못해 진부해져버린 이 세계를 견디는 우리가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아릿한 우정의 징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요정처럼 뛰노는 아이들의 순수를 묘사하는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순수가 사라진 세계 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각자 다른 공간에 흩어져 슬픔을 삼키는 성인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유형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