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주로 하던 시절에도 나는 공연이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앨범을 만들고 싶어서 이 일을 계속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풍부한 서정을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재탄생시키는 윤상에게서 가수와 작곡가는 물론 프로듀서, 엔지니어로서 다채로운 자질을 발견하는 기쁨은 어느덧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그는 이제 30년이 넘는 이력 중 드물게 남은 미개척지였던 영화음악으로도 향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음악감독을 거쳐 영화의 소리를 매만지기 시작한 윤상의 근황을 물었다.
- 영화음악감독 데뷔작인 호러 <뒤틀린 집>에 이어 <뉴 노멀>도 스릴러 장르다. 그동안 가수 윤상이 보여준 색채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분위기로 영화음악을 작업하고 있다.
= 정범식 감독이 처음 의뢰했을 때 <뒤틀린 집>의 영향으로 내게 연락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더라. 그래서 나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작업의 인연은 운명인가보다 여기는 편이라서. 정범식 감독은 알고보니 그 자신이 이미 작곡가이기도 하고 음악과 장면이 싱크되는 타이밍의 0.1초까지 꼼꼼히 조율하는 식으로 음악의 디테일을 굉장히 중시하는 연출자였다. 그래서 추측건대 호러, 스릴러는 음악 외에도 사운드가 많이 필요한 장르인 만큼 여러 일을 맡겨도 수월하게 해낼 기술자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다.
- 겸손하지만 의미심장한 말로 들린다. 기술자라는 말 안에는 윤상의 디스코그래피를 압축하는 많은 레이어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작곡, 프로그래밍, 믹싱, 마스터링 등 전천후 작업에 능하고 사운드를 치열하게 탐구해왔다는 점에서.
= 그런가. (웃음) 영화음악은 감독이 그려놓은 비전을 따라가는 작업이라 또 그것 나름의 재미를 느낀다. 외려 마음은 편하다고 할까.
-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보다는 영화를 우선시해야 하는 경우에 윤상이 느끼는 재미란 어떤 것일까.
= 감독이 ‘오케이’ 하는 강도가 점점 높아질 때의 희열이 있다. 서로의 느낌이 절묘한 접점에서 들어맞으면 ‘아, 내가 해냈구나’ 싶은 거지. 음악뿐 아니라 영화 속 뉴스의 오프닝송, 모바일 앱의 알림음 하나까지 모두 새롭게 만들어낸 것인데 작은 디테일이지만 ‘오프닝송은 좀더 경쾌했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감독의 구체적인 주문이 상당했다. (윤상은 실제로 KBS, JTBC의 뉴스송을 만들기도 했다. “KBS는 신뢰감 가는 사운드를, JTBC는 더 젊은 느낌을 원했다.”) 영화는 여러모로 협업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같다. 비교하자면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 땐 방송 편성 일정이 촉박하기도 해서 혼자서 작업한 분량이 거의 90%였다. 젊었던 것도 이유일 테고. (웃음) 이번엔 정동원 배우의 에피소드에서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 원곡을 연주해야 한다든가, 슈트라우스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영화에 맞게 새로 편곡하는 등 혼자선 어려운 작업이어서 대학원에서 만난 정마태 작곡가와 팀을 꾸렸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동료가 된 사이다.
- 아들인 라이즈의 앤톤(찬영)도 <뉴 노멀> 작곡에 참여했다.
= 작업 당시만 해도 찬영이 가수를 할 거란 확신이 없었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연습생 생활을 지속했지만 데뷔도 미지수였다. 그러던 중 <뉴 노멀>을 작업하다가 수년 전에 찬영과 둘이서 도쿄에 놀러갔을 때 알게 된 그 애의 음악적 색깔이 (최)민호 배우가 나오는 에피소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찬영에게 영화 시나리오와 시퀀스 일부를 건넸다. 받아보고 마음에 안 들면 음악감독인 내 재량으로 안 쓰면 그만이니 처음 제안은 가볍게 던진 셈이었는데 밤새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사실은 걱정을 꽤 했다. 이러다 막상 작품에 못 쓰게 되면 얼마나 상심할까 싶어서. 그런데 완성된 트랙을 받아보니 괜찮았고 정범식 감독도 마음에 들어 했다. <뉴 노멀>은 나조차도 제대로 몰랐던 찬영의 재능을 확인하고 응원할 수 있게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고마운 영화다.
- 에피소드별로 최지우, 이유미, 최민호, 피오, 하다인, 정동원 등 메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저마다 주제곡을 가진다. 여러 인물들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테마를 어떻게 잡았나.
= 정범식 감독이 맨 처음 영화의 정서를 아우르는 곡으로 미소의 <Alone>을 들려주었다. 노래가 지닌 묘한 개성에 반하기도 했지만, 이 곡 자체가 이미 옴니버스영화 같은 형식이었던 터라 감독의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 노멀>의 엔딩 크레딧에 쓰인 <Alone>은 이 노래가 1분40초가량 한참 전개된 뒤에야 새롭게 흘러나오는 부분을 쓴 것이다. 나 역시 이 노래가 실제로 그러하듯이, 영화음악이 당도할 목적지를 정해두고 그 과정을 채우는 다채로운 베리에이션을 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 윤상과 영화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어떤 이야기가 궁금하고 감정의 해소가 필요할 때에 영화만큼 유용한 매체가 없을 것이다. 직업적인 이유로도 내 가슴을 작업에 준비된 상태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살다보면 음악을 만드는 사람조차도 음악을 자주 못 듣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가슴부터 음악과 멀어진다. 대중음악을 만드는 사람에게 감정은 무척 중요한 재료여서 늘 어느 정도 ‘절여져’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더 영화와 가까이에 있으려고 했을지도.
- 스튜디오에서 노래하는 윤상도 보고 싶다. 개인 작업에 대한 계획은 어떤가.
= 목표는 솔로 앨범의 가시화다. 정규 앨범을 14년 전에 냈다. 마음 한편에 지난 앨범이 나의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작곡가로서 분주히 살다보니 가수 윤상의 일은 약간 중단된 감이 있었는데 미결의 실마리를 이제 풀어보려 한다. 1990년대 말 이후 처음으로 집이 아닌 외부에 따로 녹음실도 만들었다. 지금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음악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준비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