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천재와 심리학 교수 사이의 우정을 그린 영화 <굿 윌 헌팅>(1998)에서 현명한 어른 숀(로빈 윌리엄스)은 진심 어린 말로 윌(맷 데이먼)의 닫힌 마음을 두드린다. 이 장면의 힘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내용에 있지 않다. 정답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좌절하는 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해와 공감은 서로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이토록 먼 우주를 건널 에너지를 확보할 방법은 마음을 연료 삼아 불태우는 것뿐이다.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전달되는 방식과 타이밍, 그리고 기어코 가닿겠다는 간절한 의지다. 숀은 “나도 아는 게 많지 않지만 (너를 평가하는) 이 기록들 다 헛소리야”라고 운을 띄운 뒤 낮은 목소리로 반복해서 읊조린다. 숀의 눈빛, 표정, 몸짓이 온전히 윌을 향할 때 비로소 윌에게서 출발한 (마음의) 파동은 서로 다른 처지와 경험, 세대를 초월해 숀에게 당도한다.
마블은 광활한 우주에서 길을 잃었다.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를(혹은 너무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더 마블스>의 어수선함이 마블의 현재 좌표를 증명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MCU의 몰락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성적으로) 이유를 꼽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한번 발을 디디면 싫어도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으리란 사실에 그들은 안심하고 팬들을 방치했다. 더 큰 세계관, 더 넓은 무대, 더 많은 이야기의 확장에 치중하는 사이 슈퍼히어로의 본질마저 희미해져버렸다. 정치적 올바름을 단순한 덧셈으로 계산하는 사이 마블의 영웅들은 자기희생의 장엄함을 잃었다.
당장의 흥행 수치 문제가 아니다. <더 마블스>가 부진해도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OTT 시리즈 <로키2>는 호평을 받으며 순항 중이다. 진짜 문제는 고인 물들이 시큰둥해지고 뉴비의 반응도 뜨뜨미지근하다는 데 있다. 망해가는 격투 게임, 서비스 종료를 고려해야 하는 MMORPG의 패턴을 성실히 밟아 나가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고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진퇴양난. 어떻게 만들어도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자신을 내던진 마블은 지금 함정에 빠졌다. 어떻게 봐도 마블의 패착이고 오만이고 책임이다. 하지만 21세기 슈퍼히어로영화의 비상을 함께했던 팬 입장에선 (감성적으로) 항변하고 싶다. “(전부) 네 잘못(만은) 아니야.” 다만 네겐 아직 숀 교수처럼 “너를 평가하는 기록들이 다 헛소리”라고 말할 확신이 없다. 제대로 변호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굳이 지금, 특집을 준비했다.
마블의 성공이 마블만의 힘이 아니었던 것처럼 마블의 하락 역시 마블만의 잘못은 아니다. 여기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있다. 돌이켜보면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성공 역시 일정 부분 우연의 산물이었다. 안정적인 속편과 보장된 수익이 필요한 할리우드의 오래된 욕망은 ‘시리즈’와 ‘프랜차이즈’라는 형태로 발현됐다. 한편 CG의 발전은 코믹스의 상상력을 스크린에 실감나게 재현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두 가지 흐름이 교차했던 2008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 엠 아이언맨”이란 선언을 기점으로 빅뱅이 일어났다. 이후 10년간 종횡으로 이어지는 ‘세계관’ 모델은 스크린을 지배했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이후 영원할 것 같았던 팽창은 비로소 한계에 다다랐다.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음에도 마블은 확장의 욕망에 다시금 몸을 맡겼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시대가 바뀌었다. 코로나 이후 스크린과 OTT가 평행우주처럼 대등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지금, MCU는 OTT 시리즈가 메인이 되고 영화가 일회성 이벤트나 브리지처럼 소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업의 조류가 바뀐 상황에서 슈퍼히어로영화는 어떤 변신을 준비 중인가. 아는 게 많지 않다. 너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너를 제대로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