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인의 데구루루]
[김세인의 데구루루] 정글 없는 도시
2023-11-30
글 : 김세인 (영화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연출)
영화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연출

조바심이 났다. 겨울에 촬영 예정인 작품의 주요 배경이 방콕인데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둘러 가보아야겠다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일년이 지나서야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제 방콕 분량의 각색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방콕이라는 도시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어 촉감, 냄새, 색깔 무엇 하나도 어렴풋하게나마라도 잡히는 것 없이 부옇게 느껴졌다. 상식이 부족한 편이라 방콕은 정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방콕에 대해 무지했다. 차라리 우주 공간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한 것이 아닌 것을 써본 적이 없다. 충분히 겪어봐야지만 쓸 수가 있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은 삶을 통과하며 밟아보고 닿아보고 스쳐갔던 것들을 모아 만들었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몸을 주물러보곤 한다. 글을 쓸 때 나는 거대한 식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생활 속에 부유하는 여러 무언가들을 부지런히 삼키고 소화시키고 양손으로 글을 쓴다. 그 무언가가 내 몸에 흡수되고 손으로 새어나가는 이동이 거대한 식물의 광합성과 비슷한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좋은 글, 좋은 숨을 내뱉기 위해 술도 적게 마시고 자전거도 타고 그렇게 건강하고 불순물이 없는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아무튼 그래서 내 이 몸을 방콕에 심어봐야 하지 않나 싶은 거다.

내가 가보지 않고 글을 못 쓰겠다고 말하자 어떤 지인은 “세인아 너는 우주영화 찍으려면 달에 꼭 가봐야 하니?”라고 말했다. 가야지. 갈 수 있다면. 달도 가고 조선시대도 가고 지옥도 가고 갈 수 있다면 가야지. 그래야만 쓸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낯선 것을 쓸 때 더 자유로운 작가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글을 쓰는 것에서도 살아가는 것에서도 낯섦 앞에서 패닉이 되어버리는 성향이기 때문에.

전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주요 장소 중 하나는 수경이 운영하는 좌훈방가게다. 그때에도 나는 촬영 직전이 되어서야 로케이션 헌팅차 좌훈방이라는 공간을 처음 방문했다. 좌훈방에 들어서자마자 인터넷 리서치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바로 연기의 위력이었다. 좌훈방을 가득 채운 연기로 눈물과 기침이 자꾸 나서 스탭들은 밖으로 피신까지 했다. 좌훈방의 연기가 다 공해라는 대사를 직접 썼지만 그 말의 무게를 그제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수경이 느끼는 삶의 고됨을 다시 진정으로 느끼며 수경이라는 사람을 다시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쓰려면 인물이 지나는 공간들을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방콕 방문에서는 오히려 기존 시나리오에 없는 장소들 위주로 걸어볼까 했다. 동선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이 인물들의 쓰이지 않은 시간들을 보고 싶었다. 실제 시나리오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기존 시나리오에 없는 도시의 장소들을 걸으며 인물들을 새로운 공간에 상상으로 움직여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 안에서 기존 시나리오 속 동선에 대한 확신과 인물에 대한 믿음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콕에 도착하고 나서는 계획을 수정했다. 내가 상상했던 방콕과 실제 방콕은 너무 달라서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이차적으로는 역시 시나리오 속 장소들의 상상과 현실을 빨리 일치시켜야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님에게 받았던 모델이 된 장소의 영상과 사진, 리서치로 본 이미지들과 실제는 차이가 컸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방콕이 도시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나는 자꾸만 방콕을 정글로 상상하고 있었다. 이게 다 아피찻퐁 때문이야.

방콕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다리들이었다. 육교 위에 또 육교가 있고 육교 옆에 또 육교가 있었다. 쇼핑몰과 쇼핑몰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 호텔과 호텔 사이 스카이 브리지가 놓여 있었다. 지면에 닿지 않고도 여러 블록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택시와 오토바이들이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거나 멈춰 있었다. 결코 한적한 틈 없이 도로 위는 언제나 차로 채워져 있었다. 방콕 담당 피디님은 교통 체증과 더위 때문에 다리들이 많다고 했지만 나는 그 수많은 다리들이 방콕의 친절함과 다정함으로 느껴졌다. 건물들이 단독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로 더불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양새로 보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스카이 브리지를 건너며 이렇게 수용되는 기분에 모두들 방콕으로 모이는 것일까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님도 시나리오 속 인물들도 방콕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이는데 나도 그들을 따라 점점 더 방콕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이 지면에 상세하게 적을 수는 없지만 방콕에 대해 갖고 있었던 선입견과 오해(가령 정글이라든지!)가 버려지는 만큼 분명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다. 훌륭한 3박4일의 시간이었다.

또 하나 굉장히 놀랍고 감격스러운 발견이 있었다. 원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실제 시나리오에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티아라의 노래를 게이클럽에서 듣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게이클럽에서 티아라의 노래는 일명 ‘끼곡타임’에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라고 들었다. 그런데 자료조사차 이태원 게이클럽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도 단 한번도 듣지 못해 아쉽고 섭섭했다. 심지어 클럽 영업이 끝나고 불이 켜지는 시간까지 기다렸건만! 그런데 로케이션 확인차 들른 방콕의 게이클럽에 들어서자 익숙한 전주가 흐르고 티아라의 노래가 연속적으로 틀어졌다. 무대에서 태국의 게이들이 티아라의 노래에 맞춰 정확한 안무를 추기 시작했다. 실제 그 티아라 끼곡타임을 마주하다니! 한껏 고양되고 행복한 마음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마치 내가 원작 소설로 걸어 들어온 것만 같았다. 비로소 그 순간 실감이 난 것이다. 몇년 전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낄낄대고 눈물 흘리며 읽었던 그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정말로 여기 방콕에서 찍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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