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비평]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앵그리 애니> <키리에의 노래> <너와 나>
2023-11-2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와는 별개로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노래는 대부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노래는 호흡을 가다듬는 휴지부이거나 공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치트키이거나 팬서비스다. 노래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영화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는 서사나 감정의 보충재이거나 관객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백에 가까운 혼잣말이다. 혹은 단체 군무를 위해 마련된 반주곡이다. 어느 쪽이든 감정전달이나 분위기 환기를 위한 친근한 매개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논의할 영화 속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 역시 크게는 영화 속 다른 노래 장면과 비슷한 한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 이들 영화에서 노래가 기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과잉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그저 인상적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힘든 끈적함을 남긴다.

<키리에의 노래>는 버스킹하는 키리에의 노래를 영화 상영 환경에 맞춰 정제하기를 거절하고 현장음에 가까운 사운드로 들려준다. 이는 관객을 현장에 있게 하기라는 불가능한 욕망의 발현처럼 보인다. <너와 나>에서 세미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끊지 않고 보여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노래가 지금 여기에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향해가는 순간을 긴장하며 마주했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청춘의 노래 사이로 약간의 불협화음을 형성하는 다른 노래가 불현듯 끼어든다. 1970년대 프랑스의 임신 중단을 시도하는 여성의 이야기 <앵그리 애니>에서 수술대 위에서 긴장한 여성을 다독이기 위해 들려오는 담담하고 우아한 노랫소리다. 반주도 관객도 원치 않는 독립된 노래는 노래하는 여자들에 관한 작은 기원을 그려볼 용기를 주었다.

지금 여기 스크린에는 노래하는 여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나지막이 속삭이고, 누군가는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외친다. 누군가는 임신 중단 수술 중인 이의 곁에서, 다른 누군가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집을 찾지 못한 이들의 거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안산의 허름한 노래방에서 노래한다. 시기도 장소도 부르는 사람들의 나이도 다르지만, 이 노래들은 각자의 죽음을 딛고 서 있다. <앵그리 애니>는 법적 보호는 물론 이웃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내몰리듯 선택하는 임신 중단 수술과 이로 인한 죽음을 그린다. <키리에의 노래>는 피할 수 없는 재난에 휘말려 죽지도 못한 채 사라진 이들을 기억한다. <너와 나>는 꿈속의 환영으로 표현된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삶을 되살린다. 노래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강렬한 주술과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 사이, 이중의 압력에 의해 터져 나오는 마찰음과도 같다. 이 보이지 않는 강인한 소리-존재는 기억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수축된 메시지, <앵그리 애니>

노래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되기 쉽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위한 투쟁을 다룬 영화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앵그리 애니>는 임신 중단이 법으로 금지된 시기를 배경으로,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를 통해 비공식 시술을 선택한 공장 노동자 애니가 이후 같은 단체에 몸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 블란딘 르누아르가 관객을 수술대 위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수술을 예상보다 간단하게 만들면서다. 수술을 앞둔 이들에게 활동가들은 자전거 펌프를 이용해 공기를 주입하고 빼내는 과정으로 수술을 설명한다. 자전거 펌프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제 시술 도구다. 모인 이들의 얼굴에 비친 의심과 불안은 관객에게도 전이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애니 동료의 대사가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지고, 신뢰감을 주던 활동가들의 얼굴이 한순간 사악하게 돌변할 것만 같다. 불확정적 상황이 주는 불안함을 통해 관객은 수술대에 누운 순간, 다만 의사를 믿을 수밖에 없는 환자의 상태와 합일된다.

의심이 누그러지는 순간은 임시 수술실에 동석한 모니크가 애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노래를 귓가에 속삭이면서부터다. ‘최악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샹송, <Les enfants du pirée>의 가사는 굳이 번역되지 않을뿐더러 번역이 불필요해 보인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주는 편안함과 다정함만이 이 순간을 말할 때 고려할 부분이다. 친절함과 간단함은 오늘날까지 의학이 점해온 복잡성에 의한 카리스마와 대비된다. 애니가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임신 중단만이 아니다. 의사가 매 순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며 환자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광경이다. 애니의, 그리고 MLCA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후자를 향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라는 표현된 목적보다 크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을 아우르는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의 시대적 배경은 <앵그리 애니>의 배경인 1973년을 포함한다. 서로 다른 시기에 원치 않은 임신과 중단을 경험한 두 친구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뽐므는 사진관에 걸린 사진을 매개로 소식을 알 수 없던 옛 이웃 수잔과 재회한다. 사진사 제롬과 동거하며 홀로 어렵게 두 아이를 키우던 수잔은 최근 셋째를 임신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뽐므는 수련회를 핑계로 돈을 마련해 수잔의 수술을 돕는다. 그 후 한동안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은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삶이 느슨하게 이어져왔음을 확인한다. 수잔이 노동자이자 활동가로서의 삶을 산다면 뽐므는 자기 경험을 노래하며 순례하는 예술가의 삶을 산다. 시간과 경험이 변화하면서 뽐므가 부르는 노래 역시 변모한다. 고등학교 합창단에서 부르던 찬송가는 불법 임신 중단 수술을 받은 여성의 재판이 이뤄지는 법정 앞에서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 외치는 투쟁가로 변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임신을 하게 된 뒤에는 배가 불러오는 느낌을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과 풍선에 빗대며 여성성을 긍정하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는 수잔과 뽐므를 통해 누구의 삶도 대상화하거나 동정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연다. 둘의 활동은 각각 교육 활동과 예술 활동으로 분리할 수 있으나 어떤 것도 우위에 있지 않다. 다만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두 활동이 <앵그리 애니>에서 합쳐진다. 예술의 장소는 거리 혹은 무대로부터 개인의 내밀한 장소로 옮겨간다. 노래는 거리라는 공공장소가 아니라 수술이 이뤄지는 임시적인 장소에서 불린다. 장소의 변화는 운동의 강조점의 이동을 표시한다. 법의 폐기와 제정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목표는 개별 여성의 경험을 교정하는 일상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목적이 이동할 때 운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의술은 차가운 메스만이 아니라 따뜻한 입김도 필요하다. 수술이 이뤄지던 좁은 방에서 불린 노래는 메시지 없이 수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존재의 이완, <키리에의 노래>

<앵그리 애니>의 번역되지 않은 노래와 달리 <키리에의 노래>의 삽입곡들은 자막으로 충실히 번역되어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에게도 의미가 전달된다. 반면 노래의 목적은 가사에 의한 의미 전달과는 무관해 보인다. 키리에의 노래는 이미 하나의 사건이다. 키리에가 유일하게 소리 내는 순간은 노래할 때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적 노래나 가사도 노래를 둘러싼 설정을 넘어서지 못한다.

키리에가 지닌 실어증의 근본적 원인은 대지진의 경험과 언니의 실종이지만, 이러한 설정이 힘을 받는 다른 이유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 세계와의 연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에는 종종 1인 2역의 모티프가 작동되어왔다. <러브 레터>(1999)에서 나카야마 미호는 현재 연인, 와타나베 히로코와 그의 동명 첫사랑 후지이 이츠키를 동시에 연기했다. 그와 20여년의 기간을 두고 만들어진 <라스트 레터>(2021)에서 히로세 스즈는 첫사랑과 첫사랑의 성장한 딸을 동시에 연기한다. 이러한 모티프는 실제의 재난과 만났을 때 그 의미가 증폭된다. 키리에의 본명은 루카이며, 그는 실종된 언니의 이름을 제 것으로 삼아 살아간다. 언니를 연기한 배우 아이나 디 엔드는 성장한 동생 역할도 맡아 회상과 현재를 오가며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1인 2역은 존재의 부활 혹은 환생과도 같다. 키리에의 실어증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아리엘이 물속에서 물 위의 세상으로 건너갈 때 그랬듯, 다른 세계를 통과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의 흔적처럼 보인다.

<키리에의 노래>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흔들리고, 음악은 내내 배음으로 깔린다. 영화를 보면서 광고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떠올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영상의 성격을 가르는 이러한 분리가 어느 정도는 경멸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테지만, 영화는 노래에 온전히 바쳐지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음악이 끊이지 않는 탓에 장르가 ‘뮤지컬 영화’로 구분되기도 하나, 이 기이한 뮤지컬은 여느 뮤지컬 영화와도 비슷하지 않다. 보통 뮤지컬 영화에서 일상 장면과 노래 장면은 분리된다. 일상이 노래와 춤을 통해 판타지로 이행하는 순간을 영화는 마법처럼 그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행의 순간은 때때로 작위적이고 어색한 경우가 많다. <키리에의 노래>는 실어증 설정을 통해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종합적으로는 극적이기보다는 기록적이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이때 뮤지컬 영화의 의미는 영화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현장의 뮤지컬이다.

영화의 목적은 버스킹이 이뤄지는 거리에 관객을 세우는 데 있는 것 같다. 화자의 말을 이해하는 관객보다는, 알아듣지 못해도 어딘가 절박해 보여 발걸음을 멈춘 관객이 영화에 걸맞다. 후반부의 버스킹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의 귀를 혹사하듯이 현장의 사운드를 최대로 높여 송출한다. 가사 전달이 아니라 현장으로 불러오기, 감정 전달하기가 영화의 목적임을 알리는 듯하다. 이는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에서 인터뷰이로 출연한 배우 야마모토 다로의 말과 공명한다. 마을 주민들에게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는 그는 “일단 제가 필사적이라는 것만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키리에의 노래>에서 필사적인 노래도 특정 사건의 지각이나 이해보다는 상실에의 공감에 향해 있다.

카메라의 흔들림은 배음으로 깔린 대지진의 흔들림과 실종자의 유령에 가까운 시선을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게 느껴진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이와이 슌지의 영화다. 이런 관점에서 <키리에의 노래>를 청춘 영화의 맥락에서 보는 것도 여전히 필요하다. 1인 2역을 통해 이완될 뿐 나이 들지 않는 인물들과 함께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영원한 삶에 앞서 영원한 청춘을 염원한다. 가사 없는 음악의 멜로디는 시종 흔들리는 카메라와 함께 영화 전반에 지속된다. 멜로디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간주곡이다. 시작도 끝도 표기되어 있지 않기에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멜로디가 이어지는 한, 노래 역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이 끈질긴 노래는 새로운 청춘의 수혈을 받으며 지속될 청춘 영화를 열망하면서도, 짐짓 청춘에 끝없이 작별을 고하며 절연을 꿈꾸는 듯하다.

동물화된 세계, <너와 나>

<키리에의 노래>가 1인 2역의 세계라면, <너와 나>는 꿈을 투과한 분신에 의한 2인 1역의 세계처럼 보인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상 세미와 하은은 내내 죽음을 사이에 두고 자리 바꾸기를 한다. 세미는 어느 날 하은이 죽는 불길한 꿈을 꾼 뒤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있던 하은을 무작정 찾아간다. 세미는 다음날 자신과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고 나면 혼자 남겨질 하은이 불안하다. 그는 어떻게든 하은과 함께 가고 싶다. 세미의 세계 안에서 하은은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죽은 새와 같은 불길한 징표들은 오직 하은에 대한 세미의 걱정을 증폭하는 도구로 쓰인다. 세미의 예상과는 반대로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죽음에 가까운 방향이라는 것을 관객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다. 영화 내내 세미는 하은을 걱정하고 그에게 미안해한다. 실로 잔인한 일이다. 피해자가 생존자를 위로하고 미안해해야지만, 겨우 추모의 대상이 되리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우리는 잔인함에서 눈을 돌려 영화가 살려낸 찬란한 하루를 애써 긍정할 수 있다. 영화는 참혹한 재난을 묘사하는 대신 두 소녀에게 주어진 단 하루를 관객이 함께 살아볼 기회를 준다. 이 시간은 상실의 예감으로 인해 특별하고 애달픈 것이 된다. 노래방에서 세미는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빅마마의 <체념>을 부른다. 이 노래는 재난을 통한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닿고자 하는 욕망 없이 오직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여고생의 내밀한 감정 문제로 수축한다. 물론 하은이 없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은 노래가 대상에게 온전히 가닿을 수 없음을 암시하며 애상감을 남긴다. 노래방에서 가사와 함께 배경으로 흐르는 뮤직비디오에는 세미와 하은이 함께인 모습이 담겨 있다. 사랑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변형되고 압축되어 세속적인 풍경이 된다. 영화는 그렇게 평범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영화의 화면은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 있다. 뿌연 화면은 ‘꿈’이나 ‘소녀와 청춘’ 혹은 ‘실제 일어난 재난과 눈물’ 따위를 표시하거나 암시하는 지표일 수 있다. 혹은 영화 내내 강조되는 거울처럼 그것이 하나의 필터를 투과한 이미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이미지 위에 흔히 깔리던 음악 사용은 절제된다. 그러다가 노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노래의 세계로 건너가듯 후반부에만 음악을 배치한다. 노래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단순하고 짧은 말의 반복이 곧 음악이 되는 세계로 수렴된다. 말미에 등장한 ‘사랑해’라는 반복되는 속삭임은 영화가 필요로 한 유일한 가사이자 멜로디다.

세미와 하은의 사랑이 압축된 자리에 피어난 다른 존재는 흰 개 똘똘이/진식이(이하 똘똘이)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똘똘이는 세미가 간식을 사러 간 사이 하은과 함께 사라졌다가 어느 밤 환하게 불이 켜진 운동장에 다시 나타난다. 똘똘이는 세미와 하은을 헤어지게 했다가 다시 만나게 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자신이 세미와 하은에게 구조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짖는 것으로 주로 소통하는 개의 존재는 오늘날 메시지가 수축하는 경향과 소통 방식의 동물화 경향을 나란히 두고 살펴보도록 이끈다. 메시지가 정확히 적히지 않은 형식은 한편으로는 메시지를 회피하려는 욕망의 발현처럼 보인다. 동물은 메시지 회피의 도구이자 그 자체로 오늘날의 소통을 요약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동물화된 것만이 소통과 공감을 불러오게 될 것이며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이제 비교 우위를 점칠 필요조차 없다. 인간의 생과 사가 잡음에 가까운 형태로 쪼그라든 채 기입된 <당나귀 EO>는 오늘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메시지가 탈색된 채 뭉뚱그려진 지금의 노래들은 동물화를 통해서야만 겨우 인간일 수 있는 현실을 다독이고, 외치고, 흐느낀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