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빅슬립’, 구원과 연민을 섣불리 절충하지 않는 속 깊은 사려
2023-11-22
글 : 정재현

기영(김영성)의 삶은 어느 때 불시에 들여다봐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로 채워져 있다. 숨 쉬듯 피우는 담배 몇 개비, 공장에서의 과묵한 노동, 거실 베란다에 무성한 화초에 물 주기. 온기가 틈입할 새 없이 빠듯하고 건조한 일상을 살던 기영의 앞에 어느 겨울 가출 청소년 길호(최준우)가 나타난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길호는 여러 거처를 전전하다 기영의 아파트 앞 야외 평상에서 잠을 청한다. 기영은 그런 길호를 대뜸 집 안으로 들여 씻기고, 먹이고, 재운다. 하지만 기영의 태도에 자애로움은 그다지 깃들어있지 않고 길호 역시 기영에게 빈말로라도 인사치레를 하는 법이 없다. 제 몫의 생을 살기도 벅찬 두 남자에게 소통은 사치고 예의는 가욋일이다. 하지만 기영과 길호는 한 공간에서 거주하며 서로에게 은근하고 투박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기영의 삶에 길호가 머문다 하여 기영의 하루하루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친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회사에선 원치 않는 불미스러운 노동에 내부 사정을 모른 채 동원되기도 한다. 철이 덜 든 길호는 기영이 여러 일들로 집을 비운 사이 오현(현우석)을 비롯한 가출 청소년들을 들인다. 기영은 크게 분노하며 길호를 내쫓는다. 며칠 후 기영은 집에 도둑이 든 흔적을 발견하고 길호는 친구들과 함께 빈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지내다 경찰에 입건된다.

<빅슬립>의 가장 큰 미덕은 영화의 태도다. 연출과 각본은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권, 가정 내 학대와 가출 청소년 비행 등 등장인물들이 놓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거나 무난히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영과 길호가 표상하는 인물군이 처한 현실은 영화가 끝난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빅슬립>은 거친 남성 기영을 통해 오붓한 여유나 무조건적인 선의 없이도 스스로를 챙기며 타인의 고통을 돌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각본이 조형하는 캐릭터의 섬세함 또한 등장인물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불운과 부조리 그리고 자기보다 박운한 처지에 내몰린 길호를 대하는 기영의 자세는 성인처럼 묘사되지 않고, 기영이 보이는 모든 태도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길호 또한 마냥 동정할 법한 약자가 아닌 끝없는 자기연민과 낮은 자존감으로 뭉쳐 무른 모습을 보이는 그맘때의 청소년으로 그려진다. 일견 척력만 존재할 것 같은 두 남자가 결국 서로에게 감응하는 순간은 관객이 영화에 스며드는 속도를 앞서지 않는다. 요컨대 <빅슬립>은 픽션이 구원과 연민을 다루는 손쉬운 방도와 타협하지 않아도 구원과 연민을 말할 수 있는 속깊은 시선 하나를 영화를 통해 제시한다. 영화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과 오로라미디상을, 기영을 연기한 배우 김영성은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김태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뭐가 불쌍한데? 네가 불쌍한 척하면 불쌍해지는 거야? 너 어디 가서 불쌍한 척하지마 인마.”

남들이 자신을 불쌍히 보는 시선만큼 스스로가 불행한 길호를 향해, 기영은 거친 세상에서 1인분의 삶을 건사하는 마음가짐을 거친 언행으로 전수한다. 기영이 내뱉는 대사의 기저에는 뜻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삶의 지혜도 은연중 머금고 있다.

CHECK POINT

<문라이트> 감독 배리 젱킨스, 2016

<빅슬립>의 기영은 <문라이트>의 후안(마허셜라 알리)과 닮았다. 두 남자 모두 외롭고 가난한 소년의 삶에 다가온 남자 어른이며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손길이 필요한 순간에 잠시 안식처가 되어준다. 하지만 추측건대 <빅슬립>의 길호도 <문라이트>의 샤이론도 두 어른이 삶을 이어가는 방식까진 존경할 순 없을 것이다. 두 영화는 모두 존경할 만한 사람과 존중할 만한 사람이 등식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이길 회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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