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앞에 앉은 인자한 표정의 부처. 시종일관 형태를 알 수 없는 브라운관 송출 시그널. 차곡차곡 쌓인 텔레비전들. 백남준 작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보편적 이미지들이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백남준의 대표 작품을 한 꺼풀 벗겨내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삶과 태도를 들여다본다. 평범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장난스러운 친구로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한 예술가로서 그가 무엇을 좇고 무엇과 싸워왔는지 다양한 시각 자료를 빌려 이야기한다. 안정과 생존이 전세계적 구호였던 60년대, 백남준은 자기 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혼자만의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이가 있다.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백남준의 불안과 기쁨, 고민과 행복을 넓은 시야와 구체적인 일화로 관객에게 고백한 어맨다 킴 감독이다.
- 영화 소재로 백남준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 그의 작품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작업한 것처럼 무척 현대적이다. 심지어 그는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 삶에 미디어가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백남준 작가가 궁금했다. 새 세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탐색해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몇몇 영상 속의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집착하듯 관련 영상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 인터뷰, TV프로그램, 뉴스 등 영화 속엔 그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가 등장한다. 이 자료를 통해 관객은 작가로서 백남준의 지향점과 삶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자료 수집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 아카이빙 자료 하나하나가 찾아내기 정말 어려웠던 것들이다. 몇년 동안 리서치에만 매달렸다. 다행히 훌륭한 아카이빙 PD와 조사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백남준은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 자료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남준 작가의 친구를 알게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얻었다. 그분이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면 그분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자료를 얻었고, 또 다른 분을 소개받는 식으로 연결됐다. 마치 탐정이 된 것 같았다. (웃음) 조각난 정보를 수집해 하나의 큰 진실에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70년대 이전의 자료는 그 이후의 것보다 훨씬 찾기가 어려웠다. 워낙 문서나 사진, 영상 등으로 기록된 수량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싸거나 접근이 불가능했다.
-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박서보 화백, 샌프란시스코 MOMA 전 관장 데이비드 로스, 미술사가 에디트 데커 등 많은 이들이 백남준의 친구이자 동료로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직접 들려주며 관객의 호기심을 높인다. 섭외 제안에 그들의 반응은 어땠나.
= 크게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물어봤을 때 굉장히 열린 자세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백남준 작가와의 깊고 오래된 우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이자 동료로서 모두가 백남준을 존경하고 있었다.
- 영화는 백남준을 다양한 키워드로 나누어 보여준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평범한 아들, 가난하지만 명랑한 예술가, 장난꾸러기 친구, 자기만의 신념을 가진 용감한 예술가 등. 이중 가장 조명하고 싶었던 키워드는 무엇인가.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의 기본적인 목표는 백남준을 다양한 층위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다시금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방금 짚어준 키워드들이 백남준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존재할 수 있고, 그 요소들은 그의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중에서 나는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집중 조명하고 싶었다. 백남준은 항상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거슬러 모험했다. 삶을 지속시키는 건 오직 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만 고집하지 않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계속해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에 매몰되거나 고착되는 것을 무척 경계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범주를 확장시키던 모습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
- 배우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스티븐 연과 함께한 작업 과정은 어떠했나.
= 스티븐 연은 백남준 작가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백남준이 특정 문화권에 정착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본 모든 곳의 문화를 파고들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을 맡아줄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스티븐 연은 백남준을 어설프게 흉내내지 않았다. 그보다 작가의 본질과 감정을 포착하려 했다.
- 영화는 매스미디어에 미친 백남준의 영향력을 설명한다. 어맨다 킴 감독은 어떠한가. 이번 작품을 연출하면서, 백남준의 영향력이 어떻게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나.
= 백남준의 정신이 내게 큰 힘을 주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 같은 것. 그는 자신의 신념과 목표에 지치지 않았다. 그가 모험한 다양한 시도와 변화들이 그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꼭 영화 작업을 완주하고 싶었다.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내게 남긴 유산 같은 것이다. 고난이 생겨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제목에 관해 묻고 싶다. 백남준의 작품명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영화 제목으로 차용한 이유는.
=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게 바로 백남준의 정신이다. 계속해서 사유하게 하는 것, 질문하게 하는 것. 영화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