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식탁 위의 위로, ‘3일의 휴가’ 육상효 감독, 유영아 작가
2023-12-07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죽은 지 3년째 되던 날, 복자(김해숙)는 혼자 남은 딸 진주(신민아)를 만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돌아온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바쁜 삶을 살고 있을 거란 복자의 예상과 달리, 진주는 김천에 위치한 복자의 텅 빈 집에 남아 홀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메뉴판도 없이 그날그날 자기 기분에 맞춰 백반을 내어놓는 숙련된 솜씨는 진주가 지난 3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가늠하기 충분하다. 복자는 딸에게 말을 걸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영혼이 되어 사흘간의 휴가를 얻었지만, 마음은 영 소란스럽다. 도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유영아 작가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3일의 휴가>를 써내려갔다. 어머니의 딸이기도, 딸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중첩된 교집합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애증을 끄집어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한참 동안 마음의 파도를 마주했다는 육상효 감독은 따스한 겨울 볕을 활용해 진주와 복자의 시간을 저장했다. 부엌을 통해 느슨한 연결 고리를 잃지 않는 복자와 진주의 사흘을 들여다보기 위해 육상효 감독과 유영아 작가를 만났다.

- 죽은 엄마가 사흘간의 휴가를 받아 딸을 만나러 온다는 주요 골자를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유영아 내가 꿈을 많이 꾼다. 그중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생생한 꿈들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어딘가에 잘 살아 있어도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왔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그 관계에서 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런 꿈을 꾼다. 여느 모녀 관계처럼 나 또한 엄마를 향한 서운한 감정들이 있다. 가끔은 그것 때문에 격하게 싸우기도 하고, 20대 초반인 내 딸도 나를 향해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렇게 마음의 인식 차이가 있는 사이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그려보고 싶었다. 모녀 관계의 정수, 진심에서 나오는 에센스 같은 것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육상효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읽는 내내 많이 울었다. 당시 연로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고, 나 또한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자연스레 이야기에 몰입되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나의 오랜 동료인 아내에게 보여주었는데 아내도 펑펑 울더라. (웃음) 그때 이 시나리오가 건드리는 보편적인 감성을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작업하고 싶었다.

- 영화는 선한 위트와 유머를 무기로 장착하고 있다. 서로 엇박자처럼 어긋나는 대사들이 인상적인데, 영혼이기 때문에 가능한 유머가 눈에 띈다.

유영아 쑥스럽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코미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웃음) 나는 내가 코미디를 잘하는진 잘 모르겠다. 특별히 웃기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복자는 딸에 대한 오래된 부채감으로 살아온 엄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직접 건넬 수 없어 답답할 것이다. 엄마를 보낸 뒤 백반집에서 일하는 딸의 모습에 환장할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내뱉는 여느 엄마들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했다. 특히 강기영 배우가 지상의 안내자로 등장하는데, 웃음 포인트를 잘 살렸다.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가이드 캐릭터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딸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영화적 한계를 조율하기 위해 감독님의 아이디어로 만들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너무 재미있는 장치가 되었다.

육상효 워낙 배우들이 코미디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김해숙 배우는 연기의 폭이 넓다 보니 훨씬 더 개성 있고 깊이 있는 어머니의 연기를 보여주셨다. 영혼이라는 정체성을 코미디로 활용하기 위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거나 대화 사이사이에 자유롭게 끼어드는 모습들에서 본능적인 연기 감각이 느껴졌다. 강기영 배우는 대사 타이밍에 대한 자기만의 리듬과 흐름이 있다. 자기만의 호흡이랄까. 배우로서 굉장한 자산이다. 상대 배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몸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과잉되지 않은 연기로 웃음을 준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3일의 휴가>의 묘미다. 스팸 김치찌개, 솥뚜껑 커피, 만두, 잡채, 손두부 등 다양한 음식이 등장하는데 메뉴 선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유영아 엄마가 요리를 뚝딱뚝딱 잘하신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솥뚜껑을 활용하거나 “여기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맛있으니까 내려와라” 하는 복자의 대사들은 모두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어머니가 1939년생인데, 워낙 옛날 분이시라 생일이면 국수를 해주셨다. 그래야 명이 길어진다면서. 내가 성인이 되어 따로 살게 되었을 때는 생일에 짜장면이라도 먹으라고 전화를 주시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엄마와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메뉴를 선정해나갔다.

육상효 음식은 복자와 진주의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공들여 담아내고 싶었다. 우리가 선정한 메뉴들은 모두 집밥이다. 요즘의 유튜브 먹방이나 음식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슬로모션도 걸고 선명하고 화려한 방식으로 음식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방향은 그 결과 달랐다. 예뻐 보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집밥을 보여줘야 했다. 호텔 카탈로그처럼 정교한 조명 아래에서 촬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여느 집에서 볼 법한 풍경들. 동네 식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친근한 모습들. 그런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촬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김을 많이 냈다. 음식은 무조건 따뜻해야 맛있어 보인다. (웃음)

- 하지만 엄마와 집밥, 엄마와 요리라는 소재는 익숙한 나머지 다소 구시대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이 지점에 대해 어떤 고민을 담았나.

유영아 우리 엄마 집에 가면 작은 텃밭이 하나 있다. 엄마는 거기서 키운 채소들을 투박하게 뚝뚝 뜯어다 밥상 위에 올려주신다.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예쁘진 않다. 못생겼다. 엄마가 쓰는 그릇이나 프라이팬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들을 통해 만들어진 음식을 먹으면 너무 맛있다. 엄마 세대가 부엌에 간직한 기억들을 나와 같은 자식 세대가 정서적으로 전달받고 소환하기 위해서는 같은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영화를 보면 음악이 나를 그리운 과거로 데려간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우리를 어떤 기억으로 데려간다. 그런 것을 말하고 싶었다. 또 자기 엄마만의 맛이 있지 않나. 김치 맛도 집집마다 다 다르고. 물론 이 소재가 뻔하게 다가올 수는 있다. 하지만 엄마의 음식이 지닌 인류의 보편적 감성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 집에도 엄마한테서만 얻을 수 있는 반찬이 있다. 멸치무침이다. 볶음이 아닌 무침.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엄마만의 방식으로 만든 것인데, 이 멸치무침을 보다 보면 언젠가 아무리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날 거라는 예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 미완된 상처를 끌어안은 딸과 할 말이 없는 엄마. 모녀 관계의 미묘한 순간들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딸과 엄마의 관계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했나.

유영아 엄마한테 제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바로 딸이다. (웃음) 툭툭거리고, 신경질 부리고. 내가 그랬다. 분명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데 엄마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엔 에너지가 없다. 근데 한편으론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땐 엄마가 돈 버느라 바빠서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더니. 난 그때 하도 혼자 일기를 쓰다가 글솜씨가 늘어서 작가가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바빠 당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신다. 딸과 엄마 사이엔 엇갈리는 타이밍이 있는 듯하다. 영화에서 파출부 일을 하는 복자를 지켜보는 어린 진주의 이야기는 사실 나의 기억이다. 부잣집에서 엄마가 빨래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없던 모습을 모두 보았다. 아이, 왜 눈물이…. (잠시 짧은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때는 엄마가 너무 바쁘고 지치셨고, 엄마가 여유 있어진 지금에는 내가 지쳐 있다.

- <3일의 휴가>에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반영된 듯하다.

유영아 맞다. 서울에 올라온 복자가 진주와 한바탕 싸우고 늦은 밤 김천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것도 나와 엄마가 싸웠던 어느 날을 반영한 것이다. 이 장면을 쓰면서 많이 아팠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돌아가겠다던 엄마는 내가 찾으러 가기 전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생각이 내내 가슴에 맴돌았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마침 촬영장에 놀러 갔다. 군중 사이에 홀로 걸어가는 복자를 보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더라.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복자와 슬픔과 허탈함. 외로움과 서운함. 그게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감독님의 힘이다.

육상효 많은 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이 장면에서 어느 타이밍에 어떤 음악을 집어넣을지 가장 공들였다. 관객의 감정을 극적으로 끌어올려줄 후속 장치들을 계속 고민했다. 그래서 음악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여러 번 반복해 작업하면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결과가 완성됐다.

- 영화는 궁극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3년간의 고립된 생활을 스스로 끝낸 진주는 어떤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유영아 진주는 엄마가 홀로 지내던 공간에서 엄마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3년을 보낸다. 그 시간 동안 엄마의 계절, 풍경, 이웃을 경험한다. 분명 후회와 자책감에 시달리는 순간도 많았을 테지만, 잘 몰랐던 엄마의 모습들을 알아가며 힘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 과거에 머무른다. ‘그때들’이 너무 많다. 괴로운 그때, 날카로운 그때. 3년의 터널을 벗어났을 때 진주는 이전과 달리 그때들을 버틸 힘을 얻었을 것이다. 앞으로 좀 덜 힘들게 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육상효 근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오랫동안 묵혀온 감정을 해소시킨 뒤 비로소 진주가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챙기는 따뜻한 밥 한끼의 힘이 담겨 있다. 식탁을 나누는 행위만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일상을 돌볼 근육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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