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당진으로 세트를 확인하러 다녀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P 피디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각종 TMI들과 작품에 임하는 각오, 미래에 대한 계획 등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나는 왜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걸까. 운전 중의 무료함을 달래주려 수다를 떤 것이 되레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 나는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번에도 그 말을 꺼내놓았다.
“저는 작업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항상 예민하고 강박이 심했기 때문에 사실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를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재미있어요. 요즘은 마음이 편안해요. 강박적인 것이 꼭 좋은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즐겁게 찍어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이 드라마 작업을 통해 이루고 싶어요. 그 경험이 앞으로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위해 저에게 꼭 필요해요. 피디님, 저는 요즘 너무 즐거워요.”
곰곰이 생각하던 P 피디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그런데 감독님. 예전과 달리 예민하지 않고 즐거운 것은 아직 촬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촬영이 가까워지면 예전처럼 또 예민해질 수도? 하하하하!”
그것이 나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두달 좀 넘게 남은 줄 알았던 촬영이 달력을 살펴보니 한달 좀 남은 시점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이후로 손이 벌벌 떨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밥도 못 먹겠고 그냥 소리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만 싶다. 그토록 바라던 촬영인데 막상 때가 가까워지면 왜 도망가고만 싶어질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무실을 배회하던 S 감독님을 바라보며 남 일처럼 느꼈었는데 거울 속 내 얼굴은 S 감독님보다 훨씬 더 짙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후, 안돼 안돼. 벌써 예민모드로 들어갈 순 없어. 나는 마냥 신나게 즐겁게 찍고 싶단 말이야. 기조를 다시 여유로움으로 전환해야만 한다. 마음을 다잡으려 여러 가지를 해본다.
따릉이를 탄다. 나는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날씨에 타는 자전거를 좋아한다. 오늘은 차분하게 어둑한 것이 내가 꽤 좋아하는 날씨다. 이런 날에는 새의 지저귐이 평소보다 또렷하게 들린다. 예전에는 동네 어귀를 도는 것이 좋았지만 요즘은 한강을 타고 달리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봤었던 수많은 강들을 떠올려본다. 얼마 전에도 이런 풍경을 보았는데. 이런 날씨의 한강 풍경을. 아, 그날은 한강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의 게릴라 낭송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도 참석할 수 있겠느냐고 여쭤보았는데 관계자 분이 시집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시집을 소지하고 있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서며 다시 한강을 바라본 상태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스타일이 세련되었다. 그날은 3일째 머리를 감지 않은 날이었다. 내가 머리를 감았으면 혹시 들여보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오늘은 연출팀 첫 회식이 있는 날이다. 시집 <촉진하는 밤>을 선물로 사가야겠다. 식사 전에 돌아가며 낭송을 해볼까. 어색하려나. 그렇지만 어색한 기쁨이 또 있으니까. 애써야지만 찾아오는 소소한 기쁨.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다. 예전에는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쏟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 후에 냉탕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시원하다. 옆에 다른 손님 두명이 냉탕에 뛰어들며 “아 이 맛에 목욕탕 오지” 한다. 공감이다. 이 목욕탕은 다닌 지 일년이 됐다. 매번 먼저 말을 거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탕 안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며 우신다. 나도 그 울고 싶은, 우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잠자코 탕 안에 앉아 있는다.
“북가좌동 아가씨. 얼마 전에 북가좌동을 지나는데 아가씨 생각이 났어. 보고 싶었어.”
매번 토씨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씀하신다. 거리를 걸을 때 내 생각을 했다니 감사하다. 요즘 함께하는 스탭 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반갑고 즐겁고 슬프다. 같이 있는데 보고 싶다. 지금 이렇게 함께하는데도 스탭 분들의 얼굴이 그립다. 슬프다. 이상하다. 난 왜 항상 기쁘면 슬프지.
잠을 잔다. 부옇게 일어난 혼란들을 잠재우기 좋다. 순서를 잘 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색 마감, <씨네21> 마감, 미래에 대한 고민, 싱숭생숭한 마음 등등 뭐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냥 잔다. 게으른 것도 맞지만 자고 일어나면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뭘 써야 할지 모를 때면 그냥 잔다. 고민을 안고 있는 잠은 깊은 잠이 아니다. 선잠을 자며 도중에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자고 일어나면 ‘아! 이걸 이렇게 써야겠다!’ 명쾌해질 때가 있다. 평소 산만하고 잡생각이 많은데 이 방법으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썼다. 한신 쓰고 자고 일어나서 한신 쓰고 또 자고 일어나서 한신 쓰고…. 잠으로 잡생각을 게워내고 오롯이 명료하게 느껴질 때 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기간에는 원래 많던 잠이 더 많아진다.
고양이의 잠꼬대를 듣는다. 우리 집 고양이 주안이는 매일 꿈을 꾼다. 정말 매일 사지를 휘저으며 뒤집어진 눈으로 야옹야옹 잠꼬대를 한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다. 문득 장난기가 도져서 ‘왕!’ 하고 주안이의 어깨를 잡았더니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주안이에게 미안해 간식을 줬다. 다시는 이런 장난을 치지 말아야지. 간식을 먹고 다시 잠꼬대를 하는 주안이를 소파에 앉아 바라보다가 또 망상에 빠진다. 무슨 꿈을 꾸길래 저렇게 오두방정일까. 아 혹시 꿈에서는 주안이가 사람이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곳이 주안이의 꿈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곳이, 내가 주안이의 꿈이라면 그래 그렇다면 좀 막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마냥 신나게 즐겁게 찍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