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리빙: 어떤 인생’, 빌 나이의 따스함이 영화의 정체성
2023-12-13
글 : 이우빈

초로의 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최소 6개월, 최대 9개월의 삶만이 남았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지나온 삶을 복기한다. 그는 이르게 아내를 여의고 홀로 아들을 키웠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은 자신의 아내 편만 들며 아버지를 험담하고, 갑갑한 본가에서 탈출할 생각뿐이다. 그는 평생을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부터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의미 없는 일과만 보냈을 뿐 이렇다 할 보람을 못 느낀 지 오래다. 결국 윌리엄스는 일탈에 도전한다. 우연히 만난 극작가 서덜랜드(톰 버크)와 함께 술집을 다니고 멋들어진 중절모도 산다. 전 시청 직원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과 극장 나들이를 가고 인형 뽑기도 한다. 하지만 허한 윌리엄스의 마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던 그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삶의 마지막을 시청 일로 매듭지으려 한다. 고약한 관료제 탓에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던 동네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동네 폐가를 놀이터로 바꾸는 별것 아닌 듯한 이 작업이, 그의 삶 늘그막을 뒤바꾼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이키루>(1952)를 원작으로 삼았다. 제목과 더불어 스토리, 플롯, 인물 관계, 주요 장면 등을 충실하게 따른다. 1950년대란 시간적 배경도 같지만 공간적 무대를 당대 런던으로 옮김으로써 색다른 정취를 풍긴다. 특히 영화 곳곳에 스며든 실제 50년대 런던의 아카이브 푸티지와 1.33:1의 좁은 화면비, 고전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일련의 숏 구도가 고풍스럽다. 전후 시대 일본이 아닌 런던을 다룬 만큼 영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럽고 매끄러워졌다. 전체적인 호흡 역시 원작보다 무릇 편안하고 여유롭다.

윌리엄스의 장례식 장면을 원작과 비교했을 때 분위기 차이가 두드러진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장례식 장면이 제시될 때, <이키루>는 그의 영정 사진을 무척 급작스러운 컷 전환으로 제시하며 관객의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냉정하고 재빠른 호흡으로 극의 전반적인 아이러니함을 배가하는 장면이었다. <리빙: 어떤 인생>은 다른 선택을 취한다. 윌리엄스의 영정 사진을 향해 카메라가 무척 천천히 트랙인하는 방식이다. 비교적 감정적 여운이 길고, 윌리엄스란 인물의 여진을 곱씹게 하는 태도다. 분위기의 차이는 윌리엄스를 연기한 배우 빌 나이의 고유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말수가 적을지라도 자연스레 풍기는 그의 우아함과 따스한 기운이 영화의 외양까지 주도한 것이다. 이로써 빌 나이는 데뷔 47년 만에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남아 있는 나날>로 맨부커상,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맡았다.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오면, (…) 우리의 작은놀이터가 완성된 순간에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윌리엄스가 시청 신입 직원 웨이클링(알렉스 샤프)에게 남긴 전언의 일부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란 유산을 남겼듯, <이키루>의 와타나베와 <리빙: 어떤 인생>의 윌리엄스는 놀이터란 공간을 후대에 남기면서 자신의 삶보다 긴 자신의 뜻을 잇게 했다.

CHECK POINT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감독 장건재, 2022

최근 개봉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도 삶을 마감하기 직전, 인간이 과연 어떤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일지의 문제를 다룬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예견된 죽음에 일시 당황하지만, 이내 꼿꼿한 태도로 남은 일상을 나아간다. 살아냄의 끝에는 생전에 관계 맺었던 인간, 공간, 시간의 흔적이 뚜렷이 남게 된다. 영화는 그 흔적을 그러모아 화면에 새긴다. 한편 두 작품은 20세기 영화의 유지를 이어받았단 공통점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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