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이 더현대서울 CH1985에서 상영회 & 시네마톡 행사를 진행합니다. 시네마톡에서 나눈 영화 이야기를 <씨네21> 홈페이지에서 글로 전합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다름없을 내일을 사는 현대인들을 위한 영화가 한해의 마지막에 도착했다. <리빙: 어떤 인생>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던 런던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뒤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영화다. 암을 진단받고 충격에 빠진 윌리엄스는 처음에는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회사를 무단결근하고 훌쩍 바닷가 마을로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새로운 모자를 사서 써도 그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윌리엄스의 삶에 다시 촛불을 켜는 변화는 물질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시청 공공시설과에서 함께 일하던 젊은 여성 동료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윌리엄스는 마거릿이 활기차게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일탈이 아니라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란 소박한 진리를 깨닫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 가즈오 이시구로의 <리빙: 어떤 인생>
<리빙: 어떤 인생>은 영국 런던과 그 근교를 배경으로 삼았고 실제 런던 시청에서 촬영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뿌리는 일본이다. <리빙: 어떤 인생>은 1952년에 개봉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을 원작으로 하는데(<이키루>는 우리말로 ‘산다’라는 뜻이다. -편집자) 시나리오를 집필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오랫동안 영국 버전의 <이키루>를 만들길 오랫동안 꿈꿔왔다고 한다. 그가 영화의 배경을 영국으로 삼고자 했던 이유는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찾을 수 있다. 1954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즈오 이시구로는 5살 무렵 영국으로 이주한 뒤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의 삶에 많은 영감을 준 <이키루>는 <리빙: 어떤 인생>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류에 둘러싸인 채 “그는 산 적이 없다.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소개되는 주인공 와타나베 겐지(시무라 다케시)는 30년간 결근 없이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으나 위암에 걸려 윌리엄스처럼 6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신세에 처한다. 헛헛하게 음주가무를 즐기던 와타나베 역시 젊은 여성 동료 오다기리 도요(오다기리 미키)와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윌리엄스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같은 듯 다른 <리빙: 어떤 인생>과 <이키루>
그렇다고 <리빙: 어떤 인생>과 <이키루>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건 아니다. 동아시아 특유의 끈끈한 가족주의 때문인지 <이키루> 속 와타나베는 자 삶이 무기력하고 지루해진 이유가 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와 사별한 와타나베는 재혼하지 않고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며, 이에 대해 직접적인 한탄을 내뱉기도 한다. 오다기리는 “하지만 아드님이 그렇게 살라고 와타나베 씨에게 요구한 적 없잖아요”라고 받아치는데, 그 말이 참이기에 와타나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실을 들킨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반면 <리빙: 어떤 인생> 속 윌리엄스와 아들의 관계는 훨씬 건조하게 재현된다. 윌리엄스는 같이 살고 있는 아들내외가 분가를 원한다는 걸 알지만, 서운함을 토로한다기보다 아들이 아들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더 깊은 뿌리,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리빙: 어떤 인생>이 <이키루>에 빚지고 있다면, <이키루>는 다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귀족으로 태어나 고급문화를 향유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가 말년에 생각과 생활을 바꾼 뒤에 집필한 소설이다. 온갖 산해진미를 즐긴 것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는 노년에 돌연 모든 걸 버리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 같은 갑작스런 변화는 이른바 ‘톨스토이의 회심’이라 불린다.
톨스토이가 회심 이후 집필한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법원 공무원인 이반 일리치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에 이르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리빙: 어떤 인생>이나 ‘산다’라는 뜻의 <이키루>와 다르듯 죽음을 체험하는 것 같은 독서 경험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노년의 소설가는 죽음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길 택했다면, 그에 영향을 받은 <리빙: 어떤 인생>은 훨씬 따뜻하고 포근한 어조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미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키루>로, 또 <이키루>에서 <리빙: 어떤 인생>으로, 좋은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매체를 달리하면서 거듭 재탄생한다. 그렇게 완성된 인생에 관한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오는 12월 13일 한국 관객을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