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올해의 작가 <더 글로리> 김은숙 인터뷰 ② 신데렐라가 아닌 쌍방 구원 서사
2023-12-15
글 : 임수연

- 동은과 현남, 동은과 경란 등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의 관계성도 눈에 띈다. 남성의 구원 없이도 서로를 도울 수 있는 현실적인 여성 연대를 보여준다. 심지어 동은과 현남이 가까워지는 과정은 로맨틱 코미디 뺨치는 재미도 자랑한다. (웃음)

=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오래 쓰다 보니 ‘샤랄라’한 이미지가 있나 보다. 하지만 내 인생이 어떻게 ‘샤랄라’ 하기만 했겠나. <더 글로리>에 담긴 여성 연대는 내가 살면서 직접 겪고, 듣고, 보고, 혹은 읽었던 글 안에 다 들어 있던 것이었다. 여자 김은숙과 성공한 작가 김은숙이 어떤 접점에서 만난 결과물이다.

- 극 중 문동은과 이성적 텐션을 만드는 캐릭터는 주여정(이도현)과 하도영, 두명으로 설정돼 있다. 사실 과거 한국 드라마의 남성주인공 클리셰에 가까운 쪽은 하도영 같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화양연화>를 연상시키는 신도 있지 않았나. (웃음) <더 글로리>를 구상할 때 두 인물에게 부여한 롤이 각각 어떤 것이었나.

= 주여정은 명확했다. 동은의 복수를 응원하며 피해자의 연대를 보여준다. 그의 과거를 숨기다가 반전 포인트로 쓰려고 했다. 하도영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3의 시선을 담기 위해 탄생한 캐릭터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땐 복수를 멈추라는 입바른 소리도 하지만 본인이 피해자가 됐을 때는 다른 선택을 한다. 두 인물 모두 힘을 갖고 있지만 각자 다른 곳에 권력을 쓰는 모습을 대비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도영의 ‘화양연화’가 너무 부각됐다. (웃음)

- 문동은과 하도영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폭로하는 신이 중간 중간 심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 나도 그런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웃음)

- 그런데 멋진 남자에 열광하는 반응 때문에 빚어지는 딜레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파리의 연인>, <인어공주>의 재해석이었던 <시크릿 가든> 등 전작에서도 늘 존재했다. 혹자는 계급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권력을 가진 남자의 구원으로 이를 극복해가는 서사가 가진 한계와 남성 숭배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시에 멋진 남자주인공이 만드는 판타지는 당신의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김은숙 월드의 남성 캐릭터가 가진 명암 사이에서 당신은 어떻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 내가 올해로 드라마 작가가 된 지 20년째다. 강산이 두번은 변했을 시간인데 아마 요즘은 더 빠르게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 드라마 작가를 시작했을 때는 작가가 시청률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여성 시청자들을 유입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 남자주인공을 부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나는 ‘줄 타기’를 잘해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웃음) 나는 항상 내가 만드는 이야기들이 ‘쌍방 구원 서사’라고 생각했다. 권력은 가졌지만 다른 것은 갖지 못한 남자주인공이, 가진 것은 없지만 자존심 세고 영리하고 자신의 일과 꿈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을 만난다. 그리고 권력을 옳은 방향으로 쓰는 법을 배우고 같이 구원받는다. 내가 쓴 드라마가 남성을 숭배한다는 지적은 늘 따라왔고 역으로 그 덕분에 내가 영광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양날의 검’인 것이다.

- 사실 <파리의 연인>과 <시크릿 가든>을 다시 보면서 당시 여성 캐릭터와 배우 김정은, 하지원의 성취가 상대적으로 지워졌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김태리)이 보여준 진취성과 그 의미가 대중에게도 충분히 조명받은 점이 좋았다. 시대가 바뀌었다.

= 예전에도 여성 캐릭터를 놓치지 않고 잘 만들기 위해 늘 노력했는데 대중에게 반응이 더 오는 쪽은 남자주인공이었다. <더 글로리>는 여자주인공이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었지만 앞으로 할 작품에서 남성과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여전히 헷갈린다. 내가 쓴 대사와 상황들이 요즘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지 점검하기 위해서 젊은 작가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 가령 남자가 먼저 키스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면, 그건 ‘폭력’이라는 지적이 회의 시간에 나온다. 그런데 여전히 남자가 키스를 리드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시청자가 존재하고 그들의 선호를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시대에 맞는 기준이 무엇일까 매일 공부하고 있다.

- <상속자들>만 해도 안하무인 유라헬(김지원)을 좋아하는 시청자들도 많지 않았나. 여성 캐릭터가 마냥 착하기만 한 게 아니어도 시청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 그건 유라헬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예전에는 착하지 않은 여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무결하고 순결하고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되지만 돋보여야 한다. 그래서 악역을 그리는 게 훨씬 수월하고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 땐 움직임에 한계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런 아쉬움이 든다.

- 요즘 사람들은 피해자의 사연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창작자가 진심과 진정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어려운 과제를 해냈다는 점에서 당신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게 아닐까. 작가의 기술이 무척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휘된 사례로 보였다. 사람들이 더이상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발휘한 테크닉은 무엇이었나.

= 엄마들의 레시피를 보면 “소금 약간, 마늘 적당히”라고 하는데 그건 감으로 하는 거지 숟가락 몇 스푼이라고 정량화하면 그 맛이 안 나지 않나. 드라마도 똑같다. 후배 작가들에게 “끔찍한 신일수록 깜찍하게 써라.”, “한보 말고 반보만 신선하게 써라”라고 조언한다. 일단은 사람을 홀려놓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끔 써야 한다.

- 틱톡과 유튜브 쇼츠를 통해 <더 글로리>는 더 유명해졌다. <파리의 연인>과 <시크릿 가든> 시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드라마가 중요한 트렌드로 잡아가는 풍경이 작가에게도 신선할 것 같다.

= 딸 때문에 틱톡을 알게 됐다. “너는 책도 안 읽고 커서 뭐가 될래?” “엄마! 이 안에도 세상이 있어.” 그렇게 딸과 대판 붙었다. (웃음) 심지어 나에게 직접 “유튜브 쇼츠로 드라마를 다 봤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다. 유튜브 쇼츠에 들어가봤더니 자꾸 나한테는 <미스터 선샤인> 영상을 보여준다. 재방료가 나오지 않는 방송이라니 신선했다. (웃음) 숏폼으로 보고 재밌다고 느끼셨다면 의리로 1~2회 정도는 풀버전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드라마는 대본, 배우, 음악, 미술, 편집 등 모든 것이 합쳐진 종합예술인데 쇼츠로만 보면 누군가의 수고는 지워질 수 있다. 비행기에서 목격한 어떤 승객은 <더 글로리>를 10초씩 스킵하며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드라마를 넘기면서 보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까먹고 나도 모르게 10분 동안 서 있었다. (웃음) 어쨌든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어서 작가로서 고민이 많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에서 흥행하고 젊은 층이 숏폼 플랫폼에 패러디 영상을 올리며 열광했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겠다며 작가가 틱톡의 세계를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웃음)

= 나도 아직 이유를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젊은 층을 사로잡겠다는 사심 없이 써서 그런 걸까. <더 글로리>는 연출과 연기, 음악, 미술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진 작업이었다. 그 덕분인 것 같다.

- <더 글로리>를 두고,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김은숙 드라마 같지 않다는 평도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분들은 내 전작을 보지 않은 게 아닐까. (웃음) 송혜교씨가 내레이션을 잘해줘서 그렇지 보통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이런 표현은 나만 쓴다. 아무튼 최고의 칭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냥 얼떨떨하고 좋다. 뭐가 됐든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 당신의 작품에선 늘 ‘유행어’와 ‘밈’이 탄생한다. 대사뿐만 아니라 기획 의도도 한편의 문학처럼 잘 쓴다. 문장을 잘 쓰는 비결이 있나.

= 20년째 받고 있는 질문인데, 솔직히 타고난 게 있긴 하다. 지금까지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더니 주변 후배 작가들이 약오른다고 해서 최근에 수긍하게 됐다. (웃음) 회의를 하다가 내림을 받은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재미있는 대사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작가도 타고나긴 해야 하는 것 같다. 8살 때부터 미술 실력을 뽐내는 친구들이 있는 것처럼 글도 타고나는 재능 중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글쓰기에 천재가 존재할 수 있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긴 한다.

- 절묘한 단어를 골라 내기 위해 유의어 사전을 옆에 끼고 산다거나.

= 전혀. 오타 점검할 때만 쓴다.

- 의식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다거나.

= 의식적으로 사기만 한다. 책이 쌓여 있으면 일단 기분이 좋다. 사실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을 읽고 오정희, 신경숙 작가를 좋아했던 그때가 내가 ‘독자’였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드라마 작가가 된 이후 읽은 책은 대부분 자료 조사를 위한 것이다. 일단 소재가 겹친다 싶으면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해외 드라마 등을 가리지 않고 다 찾아봐야 한다. 내가 그 작품을 보지 않았는데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지만 혹시 모를 표절 시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지쳐서 잠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펼쳐서 ‘작가의 말’을 읽는 정도로 책을 읽는다. (웃음) 지금 구독하는 OTT가 7개인데 어디서 신작이 나왔다고 하면 1~2회는 대부분 시청한다. 그렇게 시간을 쏟아 붓느라 정작 독자인 나는 사라지게 됐다.

- 어렸을 때 읽은 책이나 영화가 평생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독자였던 시절 읽었던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오정희와 신경숙 작가의 책이 이후 당신의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나. 신춘문예에 지원하던, 책을 좋아하던 김은숙의 자아가 드라마 작가 김은숙에도 남아 있다면.

= 좋은 문장을 가진 글을 좋아한다. 화려한 문체를 좋아해서 시집을 읽게 됐고, 시를 읽다 보면 어느 한줄에 꽂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 하나를 찾아냈던 기억이 이후 내가 대사를 쓸 때 영향을 많이 줬다. 그래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당선되기 전에 책을 많이 읽어두라고 조언한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있을 때 읽은 책들을 평생 뽑아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웃음)

-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

= 진지한 정통 사극을 작업하다 잠시 멈춰놓았다. 언젠가 다시 꺼내보고 싶다. 가상의 인물이 실제 역사의 어떤 시간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남녀주인공은 있지만 로맨스보다는 구국에 가깝다. <더 글로리>를 포함해 계속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내 자신이 너무 다운되더라. 내가 쓰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아닌지 판단이 잘 안됐다. 작가가 우울한 분위기에 취하면 글도 그렇게 달려간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밝은 현대극을 먼저 하기로 결심했다.(<다 이루어질지니>는 이병헌 감독이 연출하고 김우빈, 수지가 주연을 맡았다.- 편집자)

- <씨네21>과 김은숙 작가의 중요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 강릉 가구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던 시절,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가고 홀로 지방에 남아 책만 읽고 있었다. 친구가 가게를 새로 오픈해 놀러갔는데 거기에 <씨네21> 잡지가 놓여 있었다.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모집 공고가 실려 있었다. 어? 내가 좋아하는 신경숙 작가가 나온 학교인데? 나 이 학교를 가야겠어! 접수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원서를 준비했다. 부모님에게는 서울 본사로 발령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 27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9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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