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솔직한 웃음, 눈물, 커피향이 난다, <아 유 레디?>의 김보경
2002-06-12
글 : 황혜림
사진 : 정진환

호리호리한 몸에 가녀린 턱선, 수줍은 듯한 첫인상이 사기 인형처럼 가냘픈가 했더니, 이내 쨍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기 인형을 닮은 그가 아니라, 잠깐 동안의 선입견이 조각나는 소리. “옛날부터 친구들이 그랬어요. 입만 열지 말라구. 그럼 분위기 있는 여자 같다구요.” 멋쩍은 듯 쓱 웃어버리는 김보경의 털털한 말투는, 상쾌한 파괴력으로 긴장의 방어선을 해제해버린다. “가증스러워서…”라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영 쑥스러운 눈치더니, 오붓이 앉아 말문을 열자 웃음도 눈물도 참 솔직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부르며, 얼굴을 반쯤 가린 앞머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눈빛처럼 아스라하고도 도발적인 첫사랑의 공기를 되살려낸 진숙. “좋은 기억으로 남으려면 지금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할 만큼 넘치는 시선을 받았던 <친구>는 그의 두 번째 영화였다. 기억하는 이가 많진 않지만, 정지영 감독의 <까>가 그의 데뷔작이다. <친구>를 만났을 때, 김보경은 “이런 영화를 한편 하면 원이 없을 거라고, 다른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8년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전전하던 백수 시절, 백화점 지하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만으로도 “할 일이 있다는 게 기뻤다”니까. 허망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면서도 부산 진여고 시절부터 연극반과 극단을 드나들며 소망해온 연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그때는, 지금 돌이켜봐도 목소리에 물기가 번지는 기억이다. 하지만 막상 <친구>를 지나오자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과연 어떤 영화가 들어올까, 아무것도 안 들어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반, “다시 보니 별로네” 하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반이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김보경이 고른 ‘다른 모습’은 <아 유 레디?>의 주희다. <아 유 레디?>는 제각각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테마파크에서 자신의 악몽과 마주하는 모험판타지. <친구> 이후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이 섹시한 이미지를 원했던 것과 달리, 차갑고 폐쇄적인 주희와 드물게 보는 장르의 다름에 마음이 끌렸다. 주희는 아들을 낳기 위해 죽음을 택한 어머니, 아내를 포기한 아버지 때문에 남자와 세상에 불신의 벽을 쌓은 20대 후반의 동물행동학 연구원. 신인 윤상호 감독은 단발머리에 어두운 옷을 입은 김보경을 보고, “커피향이 난다”며 주희로 점찍었다. 1남3녀 중 셋째딸에, 남동생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위험할 뻔했다는 비슷한 경험을 공통분모로 다가갔지만, 주희가 되어 악몽과 사투를 벌이기 위한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뛴다는 게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타이의 오지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리다가 쓰러질 때마다 부치는 체력에 속이 상했다고. <친구>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행은 생각도 못했는데, <아 유 레디?> 개봉을 앞두고는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며 ‘주연배우’다운 걱정을 하기도 한다.

오는 6월11일부터는 복수의 칼날을 품은 무사의 딸 시명으로 <청풍명월>의 촬영장에 합류할 예정. 공장 밑바닥에서부터 뭔가를 이뤄내는 서민적인 삶도, 죽음에 이르는 사랑도 만나보고 싶다며 일곱 빛깔 꿈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스물일곱의 이 배우, 준비는 끝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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