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4일 국내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팬들의 뜨거운 환호와 함께 연말까지 유례없는 장기 상영을 기록했다. 1년. 역대 최장기 연속 상영 기록이다. 겨울에 시작된 영화는 사계절을 지나 다시 겨울을 맞이할 때까지 관객 곁을 묵묵히 지켰다. 그리고 2024년 1월4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상영 범위가 전국으로 다시 확대된다. 1주년을 기념한 재개봉을 위해서다. 응원상영, 8월3일 인터하이 특별상영, 두 차례에 걸친 아이맥스 재개봉까지 1년 새에 다양한 형태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완성됐다. 오직 애정을 가진 관객이 존재해야만 볼 수 있는 귀한 풍경 앞에서 농구만이 곧 삶의 지표인 소년들을 불러낸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과 서면으로 지난 1년을 돌아보았다. <씨네21>을 위해 단독으로 제공된 표지 이미지는 송태섭이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 위에 스케치가 덧대져 원작 만화에 저장된 그리움을 다시 느낄 수 있다. 표지를 장식하기 위해 공들여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감사를 전한다.
- 원작 만화의 마지막 시점일인 8월31일, 일본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상영을 종료했다. 원작 만화와 실제 영화 상영 종료일을 같은 날로 설정한 이유는.
= 상영 종료일을 설정하고 안내한 것은 관객들이 “언제 영화가 끝나버렸지?” 하며 아쉬워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분기점을 정하고자 했다. 8월31일은 학생들의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이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경기가 끝나고 보통날로 돌아가는 것처럼 영화 상영 최종일에 알맞다고 생각했다.
- 일본영화 상영이 종료되고 그다음날인 9월1일, <아사히신문>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전면 광고를 실었다. 2면 펼침 가득히 차기 주장이 된 송태섭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바깥에서 주인공의 미래를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송태섭인 것처럼 관객 또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태섭과 함께 걸어가는 길에 행복이 있을 거라는 마음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가자. 여름이 끝나도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코트가 기다리고 있다. 연습이다”라는 문구를 담았다.
- 한국에서 1여년을 채운 이례적인 장기 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이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관객들이 극장에서 즐기는 작품이면 좋겠다는 염원으로 만들었다. 스탭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관객들이 극장에 방문해서, 또 여러 번에 걸쳐 관람해주셔서 굉장히 감동했다. 우리의 마음이 통했다는 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만화나 영화나 다 마찬가지지만 등장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창작자가 지닌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속된 말로 ‘캐릭터가 일어선다’고 하는데, 나 또한 등장인물이 살아 있게 하는 것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작업했다. 그런데 이들을 만난 관객이 그 인물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니, 이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 영화는 세대 공감의 매개로도 유용하게 작동했다. 원작 <슬램덩크>를 몰랐던 10대 청소년들도 이에 빠져들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슬램덩크>만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북산고등학교 친구들과 또 다른 학교의 인물들에게 각자의 인생과 서사가 있다는 것 아닐까. 모든 인물이 농구를 사랑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영화와 만화가 관객에게 전해지고 긍정적인 변화를 낳는 건 창작자로서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농구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슬램덩크>를 통해 농구와 가까워진다면 바랄 게 없고, 또 전반적인 스포츠적 이해로 이어지면 기쁠 것 같다. <슬램덩크>는 농구 그 자체에서 의미가 빛을 발한다. 농구는 언제나 가치롭다.
- <슬램덩크>는 북산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주인공에 이입하는 독자들이 다른 학교 선수를 악인 혹은 적군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독자가 모든 인물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이노우에 감독에게 왜 중요했나.
= 만화와 영화는 주인공을 특정 인물로 지정하지만 현실에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의 수만큼 각각의 시선과 이야기가 있다. 농구 경기에 나간 멤버들만큼 벤치에 앉아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아우르고 싶었던 이유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모두의 인생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따금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 2023년 8월3일 오전 11시30분, 북산-산왕전 특별 상영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 시간은 원작에서 산왕전 경기가 시작된 시간인데, 해당 날짜와 시간에 맞춰 중국·대만·한국·일본 등 각국에서 동시 상영을 진행했다. 작품과 현실이 일치하는 경험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2022년 겨울에 개봉해 8월까지 장기 상영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까지 온 관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작중 시간과 일치한 8월3일 11시30분에 상영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바랄 거라 믿었다. 나 또한 이게 현실에 이뤄져서 무척 기뻤다. 특별 상영 기획에 맞춰 관객들을 위한 선물로 산왕공고 정우성군의 얼굴이 새겨진 티켓을 제작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포스터를 현실로 재현한 것이다. ‘8월3일’이라는 날짜가 들어간 선물이 그날을 기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2023년은 일본에 대농구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지난 9월, 일본 농구 국가대표팀은 오키나와 아레나에서 열린 카보베르데 전을 우승하며 파리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 우승이 결정되자마자 텐피트의 <第ゼロ感>이 울려 퍼졌다.
= <第ゼロ感> 인트로가 흘러나온 순간 경기장의 폭발적인 열기를 잊을 수 없다. 나도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웃음) 카보베르데 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여러 악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본팀이 포기하지 않고 80 대 71의 성적으로 우승을 거뒀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니. 누구도 쓸 수 없는 시나리오라 생각했다. 오히려 과한 설정의 각본이라 버려질 정도다. 농구 팬으로서 더없이 행복했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 팬들은 힘들 때 “뚫어! 송태섭!”을 주문처럼 외치며 버티고 인내한다. 지난한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통해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 이 질문 자체가 내게 큰 격려가 된다. 약자 혹은 자기만의 어려움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편에 서기 위해 이 영화를 시작했다. 누구든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빛이 늘 나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송태섭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무대가 있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재개봉과 관련해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후속작 여부일 텐데 이 자리를 빌려 직접 묻고 싶다. <더 세컨드 슬램덩크>의 제작 여부는.
= 속편에 대해 정말 자주 질문 받는다. 하지만 여기에 속편을 진행할 거라고 대답해버리면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반대로 없다고 말하면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게 된다. 어느 쪽이든 창작 활동에 속박되고 싶지 않아서 열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