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쓰라린 과거를 뒤로한 채, 우리는 영화를 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제에 대한 단상
2024-01-10
글 : 김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곤 했다. 카우리스마키는 평소에 존경한다고 밝힌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옷을 입는 동작을 오마주하듯, 환복과 같은 일상의 동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즈와 카우리스마키의 옷 입는 행위에 부여된 속성은 다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거의 반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나른한 일상의 운문적 리듬을 조탁했던 오즈는 남루한 생활감이 표백된 세련된 부르주아 가옥으로 향했다. 이와는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일상이란 관능적 매혹이 결여된 공장에서의 지루한 노동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의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미래를 꿈꿀 때 옷을 갈아입는다. 그 미래는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준비하며 비싼 옷을 사입고, <희망의 건너편>에서 핀란드로 밀항한 난민 칼리드는 이민청에 망명 신청을 하기 위해 반듯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홀라파 또한 안사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모텔 이웃에게 빌린 옷을 갈아입는다. 오즈에게 옷 입기가 현재형의 동작이라면 카우리스마키에게 옷 입기는 미래형의 동작이다.

슬픈 진실은 그런 종류의 소망이 대개 보상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성냥공장 소녀와 <황혼의 빛>의 경비원 코이스티넨은 공들여 빼입은 노력이 무색하게 짝사랑에게 버려지고, 칼리드 또한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체포될 위기에 놓인다. 홀라파 또한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정장까지 빌려 입고 안사와 만나러 간 그는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이 비극은 이후에 찾아올 축복을 예비하는 국면이다. 그럴듯하게 옷을 빼입을 때는 팽당했던 카우리스마키의 인물은 외려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상황에서 그들을 환대하는 따사로운 이웃과 만나곤 했다. 홀라파 또한 안사가 병실로 찾아와 동화 같은 입맞춤을 선사하자 잠에서 깨어난다. 달리 말하면 카우리스마키에게 옷이라는 사물은 자발적 의지가 좌절된 상황에서 비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은총을 설계하는 서사적 전략의 질료다. 그 전략은 카우리스마키가 영화라는 매체에 주요한 시간적 간격을 조율하는 방식의 하나인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편의 영화 안에서 개별적 이미지의 성질은 그것이 다른 이미지와 어떤 간격을 맺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체의 속성이 독립적이지 않고 다른 물체간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을 통해 결정되듯, 영화적 이미지를 사유하는 작업 또한 복수의 이미지를 둘러싼 간격의 작용을 간과한 채로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는 모든 이미지의 간격을 폐절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미지는 공간적 국지성을 탈각한 채 포토숍의 레이어처럼 위계 없이 뒤섞이며, 때로는 카카오톡 프로필처럼 언제라도 열람할 수 있는 것이 되어 시간적 간격마저 상실한다. 그런 산업적 경향은 미학의 영역뿐 아니라 실시간 배송과 상시적 소통이 일반화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밀접하며, 그 변화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편지를 쓰는 행동, 타인을 기다리는 행동처럼, 시간적 격차를 전제로 성립하는 낭만적 몸짓의 급진적 소멸이다. 폴 비릴리오의 말장난을 빌리자면, 이제 서신 교환(correspondence)은 디지털 이미지의 무경계적 중첩(correspondence)으로 대체됐다.

파리한 표정으로 우·러전쟁 소식이 들려오는 라디오를 끄는 인물이 나오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어떠한가. 카우리스마키는 6년 전 <희망의 건너편>을 공개하며 (지금은 번복한) 은퇴 선언을 했을 당시, “지쳤습니다. 그냥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피로감을 반영하듯, 난민과 부르주아의 이야기를 엮은 <희망의 건너편>의 리듬과 유머는 종종 맥이 빠진 듯 삐걱대곤 했다. 거창한 사건의 진폭과 사회적 사안에 대한 관심을 줄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애써 거대해지려 하지 않는 인물의 간명한 결단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응답받지 못할 쪽지를 건네주는 일, 영화관 앞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는 낭만적 활동의 소박한 정감에 주목하는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연결된 시대에 오히려 단절을 통해 세부적 요소의 간격을 강조하는 미덕이 빛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극 중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공연 장면들 또한 카메라가 번갈아 비추는 무대와 객석의 간격을 강조하듯, 관객의 시점숏과 같은 인위적 장치에 의한 연결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촬영됐다. 이쪽에서 가닿을 수 없는 저쪽을 바라본다는 시선의 활동을 넌지시 아로새기며.

영화가 사전에 좁혀지지 않은 간격을 중시한다는 점은 두 주인공의 진취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안사와 홀라파가 처음 데이트하는 장면을 보자. 카페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던 두 인물은 “이제 뭐할까요?”라고 말한 후 영화 관람을 결심한다. 그렇게 향한 영화관에는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되고 있고, 상영이 끝나면 익명의 관객 두명이 극장 밖으로 나와 <데드 돈 다이>가 각각 로베르 브레송과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를 상기했다고 말한 뒤 프레임 양쪽으로 빠져나간다. 두 조연이 과거의 영화에 관해 대화하는 것과 달리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 안사와 홀라파는 재회를 기약하는 쪽지를 주고받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짐 자무시는 현실과 격리된 채 지난 시대의 문화유산만 권태롭게 탐닉하는 중산층을 뱀파이어 커플에 은유한 바 있으며(<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좀비가 출몰한 상황을 현실의 공포가 아닌 진부한 허구적 상황으로 인지하는 <데드 돈 다이>의 인물 또한 예술이 실존과 분리된 데이터베이스로 전락한 시대의 무료함을 자조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자무시의 뱀파이어와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 계층은 예술에 근접할 여지가 드물기 때문일까? 안사와 홀라파의 표정엔 모든 것을 익숙한 레퍼런스의 재조합으로 식별하는 시네필리아적 권태(하긴, 이 글도 마찬가지겠다만) 대신, 새로운 영화와 연인을 만난다는 아이 같은 설렘이 가득하다. 과거의 영화를 떠올린 두 인물이 화면 양쪽으로 사라진 후 다시 등장하지 않지만, 두 연인은 재회를 기약한다는 점도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는 유독 과거의 상실과 실패를 뒤로하고 나아가는 장면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홀라파는 사별한 남편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간호사에게 전남편의 옷을 받아 안사를 만나러 가며, 모텔의 사내도 까닭 모를 비애감에 젖은 채 “난 이제 필요 없다”고 말하며 홀라파에게 정장을 넘긴다.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영화의 결단은, 옷을 갈아입고 절주를 다짐하는 미래형의 몸짓과 짝패를 이룬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천국은 아직 멀어>에서 언니와 사별한 사츠키는 영화 제작을 결심하며 말했다. “언니가 죽은 후 세상이 멈췄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지구는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저는 죽음 이후에 지속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아직까지 영화의 지속을 믿는 당신만이 이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쓰라린 기억과 고루한 권태를 뒤로하려는 작은 용기를 지닌 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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