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우를 배우로서 기억하기. 지금 그를 추모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2023년 12월27일,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이선균이 남긴 작품과 캐릭터들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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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은 21세기와 함께 한국영화에 등장했다. 1975년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 출신인 이선균은 2001년 졸업 후 영화계에 뛰어들어 2002년부터 10여편 가까이 상업영화 단역 출연으로 분주한 초심자의 시절을 보냈다. 2004년작 <알포인트> <인어공주>를 기점으로 업계의 물망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비슷한 시기 TV단막극의 인기 속에서 <MBC 베스트극장> <KBS 드라마시티>의 단골 배우로도 눈도장을 찍었다. 2007년은 성실히 도움닫기한 자에게 커다란 지렛대가 주어진 해였다. <하얀거탑>의 진중한 내과의 최도영과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여심을 사로잡은 음악가 최한성으로 연달아 주목받은 이선균은 방송가 루키에서 일약 주연급으로 도약했다. 그를 스크린 배우로 각인시킨 이는 홍상수 감독이다. <밤과낮>(2008)에서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홍상수 세계에 첫 등장해 <첩첩산중>(2009, 단편), <옥희의 영화>(2010)로 정유미와의 긴 인연을 시작했다. 이선균의 등장은 그 치기는 여전하지만 마초성은 한결 줄어든 홍상수 영화 속 ‘젊은 남성’의 세대교체를 알렸다.
<사과>(2008)에서는 오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한 뒤 훗날 돌아와 재회를 청하는 남자의 미스터리를, <파주>(2009)에서는 운동권 출신으로 철거대책위원회에서 일하며 처제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금기를 그렸다. 대사의 말맛을 극대화하는 일상적 연기의 진가를 보여주었던 <파스타>의 ‘솊’ 역할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단역으로 데뷔해 엘리트, 찌질한 백수, 예술가, 로맨틱 가이를 아우르는 드넓은 그의 스펙트럼이 각인되기까지 이선균의 2000년대 행보는 이 배우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그의 영면을 기도하며 발표한 추모사대로 이선균은 “한 계단, 한 계단 단단히 자기의 소임을 다하며 힘차게 정상의 계단을 올랐다. 그가 그간 쌓아올린 작품들 이력만 보아도 그 어디에도 하루아침에라는 게 없었다.” 둘, 이선균의 출현은 한국영화가 늘 과대표하는 남성성- 조폭, 범죄자, 사이코, 가부장, 형사, 군인, 재벌- 에서 벗어나, 일상에 발붙인 도시인으로서의 남성주인공을 재현하려는 욕망과도 맞물렸다. 그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와 ‘올드보이’들 이후, 스크린에서 익숙하지만 한끗 색다른 한국 남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배우였다.
이유 있는 빈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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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과 송강호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연극 무대에서 시작해 스크린으로 도약한 선배 세대들이 뿜어낸 야수적인 아우라와는 거리가 있는 배우다. 이선균을 만든 것은 오히려 위용과 과장의 기술을 뺀 연기다. 미더운 이의 넓고 깊은 저음이었다가 발뺌하며 눙치는 남자의 그것으로 돌변하는 특유의 목소리는 이선균의 한끗 힘뺀 자세를 대변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는 “한량을 꿈꾸는 인간”다운 털털함의 소유자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을 때 날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연기였어요. 연기가 무조건 목표는 아니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김성훈 감독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준 <끝까지 간다>(2013)에서 시종일관 비리와 수난에 휘말리는 경찰 고건수의 상황은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소박하지 않았으나, 배우 이선균의 존재만큼은 리얼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때로 연출자가 밀도 있게 장악한 꽉 짜인 장면의 ‘폼’을 깨트려 한방을 만들었다. 로맨스에는 날것의 민망함을, 까칠함에는 위악의 뉘앙스를, 장르적으로 과장된 상황에는 현실의 지리멸렬함을 입히는 재주가 배우 이선균에겐 있었다.
<하얀거탑> 이후 이어진 전문직 배역들- <골든타임> <PMC: 더 벙커>의 의사, <끝까지 간다>와 <악질경찰>의 경찰, <성난 변호사>의 변호사, <검사내전>의 검사- 을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엘리트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지 않는 그의 편안한 분위기가 인물의 내면적 취약함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순간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등장과 함께 일상의 외연을 끌어오는 연기 스타일은 그를 곧잘 좋은 앙상블 파트너로도 불리게 했다. <화차>의 김민희,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 <미옥>의 김혜수, <잠>의 정유미 옆에는 이선균이 있었다. 한때 그는 ‘여성배우들을 잘 받쳐주는’ 드문 남자배우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적확했던 것은 뻔한 칭찬에 관한 이선균의 반응이다. “그렇게 쓰여진 작품을 선택했고 감독의 비전과 대본의 지시에 잘 따랐다.” 영화의 뒤편에서 그는 재능이 넘치치만 아직 무명인 동료들을 열렬히 추천하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성과에 대해서는 작품을 넘어서서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쩨쩨한 로맨스> 이후 <씨네21>에 7번의 커버 스타로 등장할 동안 그의 솔직함은 초지일관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캐릭터는 <나의 아저씨>인 듯싶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에도 꺼지지 않는 온기는 남아 있음을 밝혀낸 이 조용한 드라마에서 이선균이 연기한 평범한 직장인 박동훈은 제목과 달리 누구의 아저씨도 되지 않는 자리에 남는다. <나의 아저씨>가 단단한 지지와 일각의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낸 작품이라는 점을 돌이켜볼 때, 박동훈이란 인물이 이선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역시 그간 이 배우가 걸어온 궤적과 나란히 놓인다. 동훈과 지안(아이유)은 서로를 구원하나, 둘은 서로 “편안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를 놓아준다. 키다리 아저씨 서사의 전형과 뗄 수 없으나 결코 그 전형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감동을 주는 <나의 아저씨>는 “180도 달라질 순 없어도 늘 전작보다 5도, 10도 변해보고 싶다”던 배우의 소망과도 맞닿아 있다. <기생충>은 이선균으로 하여금 봉준호 영화의 자본가라는 낯선 포지션으로 봉준호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모험의 여정이었고, 김지운 감독과는 애플 오리지널 최초의 한국 드라마인 <Dr.브레인>에서 자신과 타인의 뇌를 동기화하는 천재 과학자를 연기하면서 사뭇 슬픈 정념도 꺼내어 보여주었다. 변성현의 <킹메이커>(2022)는 일면 이선균이라는 배우에 관한 영화도 된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건져올리는 이 영화에서 이선균은 킹메이커에게 허락된 오롯한 존재감을 증명해 보인다. 지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코미디로 기억되는 작품들, <임금님의 사건수첩>과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컬트 <킬링 로맨스> 또한 이선균이 자신을 그다지 포장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배우라는 점에 근거해 빛을 보게 된 결과물들이다. 어떤 관객들에게 이선균은 영원한 홍상수의 학생으로도 남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 속 진구는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함께 나이 들어갔다. 15분의 길고 긴 롱테이크에서 “끝까지 파고, 파고, 파고 들어봐야 뭐가 중요한지 아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던 이 배우의 혈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2023년 <잠>으로 재회한 이선균, 정유미 콤비를 만나러 극장에 다녀온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비보를 듣게 됐다. 배우의 유작은 현대사의 격동을 통과하는 군인을 연기한 추창민 감독의 <행복의 나라>, 대교 위에서 위협적인 개 실험체를 마주한 청와대 행정관 역을 맡은 <탈출: PROJECT SILENCE>다. 이선균은 등장 이후 마지막까지 배우로서 부지런했다. 일기를 쓰듯 한줄 한줄 자신의 전통과 차이를 써내려가면서 이어질 다음 장의 역할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