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비평] 극장 앞의 평범한 연인들,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4-01-1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

식탁에 놓인 아날로그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알리는 뉴스가 들려온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단순한 사물과 소리의 결합이지만 기묘하게도 과거와 현재 시제가 뒤섞인 듯한 인상을 건넨다. 여전히 20세기에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착오적 연인들의 멜로드라마 위로 동시대 전쟁과 폭격을 알리는 소식이 겹쳐질 때, 이 평범한 외형의 장면으로부터 생경한 질문이 생겨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라디오 뉴스가 전해주는 현재의 시간에 정착할 수 있을까?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가 포착해온 연인들.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느 시간에 머물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카우리스마키는 은퇴를 번복하고 완성한 이 영화가 필모그래피 초기에 만들어진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연장선에 있는 네 번째 연작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두 연인에게 드리워진 시선은 일자리를 잃어버린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비추던 지난 세기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면모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줄거리나 설정의 표면적 유사성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죽은 남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되살아나는 <과거가 없는 남자>의 황당무계한 도입부처럼 이 작품이 죽음에 저항하는 영화의 방법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항하는 영화의 믿음은 지금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시 영화관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연인들은 차가운 현실을 피해 영화관으로 향하곤 했으며 극장은 그들에게 삶의 특별한 단면을 제공해왔다. 일자리를 잃고 갈 곳이 없어진 안사와 훌라파는 극장에 간다. 그리고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위기에 저항하는 일과 영화관으로 가는 일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죽음에 저항하기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연인들의 사랑과 재회를 담아낸 무심하고 소박한 소품처럼 보이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는 유독 죽음에 관한 언급이 깊게 배어 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전쟁과 폭격의 소식뿐만이 아니다. 알코올중독자인 훌라파에게 술꾼이 싫다고 말하는 안사는 부모님과 오빠가 모두 술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안사가 마트에서 해고되고 나서 새로 찾은 술집의 일자리는 전임자의 죽음으로 비어 있던 자리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화재사고가 나기 전에 폐암으로 먼저 죽을 것이라던 훌라파는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진다. 더군다나 죽음은 빈곤한 노동자들에겐 너무 값비싼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훌라파의 동료가 말하듯, 부고는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언제나 삶의 이중적인 속성(절망과 유머, 희망과 비관, 망각과 새로운 삶)이 자아내는 불화와 공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하는 작가였지만, 이 영화에서 죽음의 기운은 일상의 평온한 시간을 잠재울 만큼 강력하게 환기된다. 과거의 실책을 딛고, 망각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던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연인들과 달리 안사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기억에 붙잡혀 훌라파를 거부한다.

과거의 기록이자 프레임 바깥의 사태인 죽음은 계속해서 카우리스마키가 창안한 화면 안으로 틈입해 들어온다. 달리 말하면, 비참한 과거는 우리의 현재로 이어질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건네받는다면 미래는 과거의 답습이 된다. 견고한 현실의 규칙 아래서라면, 안사와 훌라파가 사라진 뒤에도 전쟁과 해고는 탐욕스럽게 계속될 것이다. 빈칸으로 괄호 쳐진 자리에 익명의 누군가 들어오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영화는 현실의 질서에 대항해 다른 규칙의 장소를 구축할 의무가 있다. 안사와 훌라파는 영화관에 간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극장에 가는 연인들의 모습은 익숙한 것이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그 장소의 물질성은 더욱 커다란 역할을 갖는다(카우리스마키가 이민자와 난민을 다룬 최근 두편의 영화, <르 아브르>와 <희망의 건너편>에서 영화관은 등장하지 않았거나 긍정적인 전환의 장소로 활용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은 짐 자무쉬의 <데드 돈 다이>, 죽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 자들이 나오는 영화다. 영화는 죽음으로 얼룩진 현실의 시간에 대항하는 픽션의 시간을 전해준다.

영화관에 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현실이 제공하지 않는 새로운 기억과 조우한다. 이 영화에서 현실 속의 과거는 대면할 수 없는 죽음과 설명되지 않는 비애감으로 가득하다. 그런 과거를 대체하고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에 영화관이라는 장소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픽션의 역량이 있다. 극장이 제공하는 것은 죽음에 노출되지 않은 기억의 시간이다. 관객들은 영화관에 들어가면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는 호감을 느끼는 낯선 남자에게 “이렇게 많이 웃은 건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며 서투르지만 친밀한 입맞춤을 나눈다. 영화관은 과거에 붙잡히지 않는 감정과 행동을 제공하는 장소다.

오즈 야스지로와 로베르 브레송, 비토리오 데 시카와 프랭크 카프라, 더글라스 서크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영화사의 기억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그러나 시네필적 수집이나 창조적 모방의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영화는 영화의 고전주의가 제공할 수 있는 감정과 아름다움을 차가운 동시대의 현실에 틈입시킨다. 영화라는 시대착오적 외부를 현실이라는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를 보며 기쁨을 느끼고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를 하나의 의무처럼 다룬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의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영화가 간직한 고전주의적 믿음이 진행 중인 전쟁과 죽음으로 넘쳐나는 환경에서조차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는 긴밀한 긴장과 불화를 도입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영화관은, 영화 속 라디오 뉴스가 중계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처럼 수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피소의 역할로 기능한다.

버려진 것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버려진 물건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지는 식품을 집에 가져가거나 돈 없는 부랑자에게 나눠준다. 정해진 시간을 넘겨 폐기되는 것들. 시간이 지난 음식들이 버려지듯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오래된 노동자’로 지목되는 안사와 그녀의 동료들은 버려지는 식품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마트에서 해고된다. 마트를 나온 안사는 함께 일자리를 잃은 동료와 잠시 손을 잡고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주어진 장소를 잃어버린 그들은 밤의 어둠을 걷는다. 윤곽을 흐트러트리는 어둠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고, 또한 극장의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있다.

평면적 구도의 연쇄로 이어지는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몇 가지 유형의 단면으로 구성된다. 화면 맨 위에 구름이 무심하게 떠다니는, 그러나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하늘이 있고, 그 아래 인물들이 앉거나 멈춰 서 있는 자리의 배경이 되는 딱딱한 벽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이 발을 디디고 선 바닥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하늘과 벽과 바닥이라는 단면으로 채워지곤 한다. 이 원리는 <과거가 없는 남자>의 구세군 여인 이루마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은총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지상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죠”라는 명제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도 구름은 인물들의 일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하늘이 어둠으로 채워진 밤이 돼서야 안사와 훌라파는 영화를 보고 나와 극장의 벽 앞에 선다. 안사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종이에 연락처를 적어 훌라파에게 건넨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기 위해 주머니를 더듬던 훌라파는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안사가 건네준 종이와 훌라파가 버린 담배는 바닥에 남겨진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바닥은 위태롭게 유지되는 삶의 증거를 보존하는 장소다. 종이와 담배가 바닥에 버려지는 것처럼, 바닥은 기다림의 시간이 새겨지는 장소다. 카우리스마키는 인물들이 머물고 사라지는 이 단면들에 대해 단순한 원리로 설명한다. 하나의 벽이 있고, 벽 앞에 두 사람이 머무른다. 그 위로 미약한 빛과 깊은 어둠을 드리우고, 한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과 벽 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이 있다. 벽에 선 나머지 한 사람을 마저 사라지게 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남는다. 벽을 사라지게 하면 빛과 어둠이 남겨지고 마지막으로 빛을 제거하면 어둠과 바닥이 남는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과정에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도 이 원리를 따른다.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잃어버린 훌라파는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사를 기다린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훌라파가 자리를 떠나면 바닥에 버려진 담배만이 남는다. 버려진 담배꽁초가 담긴 하나의 숏에 기적적인 재회를 예고하는 막연한 기다림이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이따금 인물의 시선보다 낮은 곳으로 향한다. 그 자리엔 고단한 노동의 흔적이 담긴 신발이 있고, 무심한 연인들의 헤어짐과 막연한 기다림을 증명하는 쪽지와 담배가 남아 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듯이, 지상에 남겨지는 오래된 시간 앞에 멈춰 선다. 밤거리의 어둠에 잠긴 그들은 바닥의 어둠에 흰색 종이와 담배꽁초를 버려두는 것으로 대응한다. 예기치 않은 희망과 약속이 나타나는 것도 그 위치에서다. 안사가 주인 없이 버려진 떠돌이 개를 발견하는 것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 영화에서 카우리스마키가 주시하는 자들은 지상에 속한 노동자이자 동물이며 연인들이다.

수평적 상속의 장소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노동자를 묘사하는 규칙은 그가 사는 집과 일하는 일터를 오가며 관측하는 것이다. 집이 없다면 그 인물이 노숙인이 되고, 일터가 사라진다면 실업자가 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는 그 규칙이 어긋나 있다. 훌라파에겐 집이 없고, 안사는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주어지는 건 술집과 영화관과 병원이라는 임시적 거주의 장소들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영화에서 이러한 임시적 거주의 장소들은 돈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자본 바깥의 장소처럼 다뤄진다. 영화의 초반부, 안사가 구직을 위해 들른 인터넷 카페에서 30분에 10유로를 지불하던 것과 달리, 어느 순간 카우리스마키는 돈을 주고받는 자본의 절차를 화면 바깥으로 밀어낸다.

안사는 대모에게 상속받은 집과 임시적인 일터에 있다. 상속은 위로부터 아래로 전해지고, 자본주의는 인간과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카우리스마키는 자본의 수직적 규칙 바깥으로 이탈하는 대신 자본과 공존하는 장소의 속성을 빌려, 수평적 상속의 이미지를 꿈꾸는 것 같다. 안사와 훌라파는 돈을 내는 동작 없이 버스를 타고, 꽃가게에서 꽃을 들고나온다. 훌라파가 묵는 모텔의 옆방 남자와 병원의 간호사는 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외투를 건네준다. 훌라파는 마치 극장의 스크린을 지켜보듯, 술집 창문 너머로 밴드의 연주를 바라보며 안사에게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도둑질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수평적 약속으로 실행되는 상속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서로가 임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의 한 부분을 빌려, 과거의 기억과 단절하고 새로운 현실의 단면을 받아들인다. 이는 필름 작업을 고집하며 영화 역사의 한 부분에서 앞선 영화들의 흔적을 상속받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작업을 환기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영화관, 술집, 병원, 그리고 다시 밤거리…. 영화와 음악과 회복과 재회는 이 영화에서 같은 의미의 계열에 속한다.

남자와 여자와 개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결말은 크게 두 가지 선택으로 나뉜다. 하나는 내부의 질서로부터 이탈해 바깥으로 떠나는 도피의 결말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의 어떤 대사처럼 국가의 규율을 벗어나 미지의 유토피아로 항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추하고 비루할지라도 끝내 지상에 남는 자들의 결정이다. <어둠은 걷히고>에서 새로 연 식당 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부부, <황혼의 빛>에서 상처 입은 몸을 바닥에 눕히고 손을 붙잡는 남녀의 모습은 이 선택에 속한다. 그들은 더 내려갈 곳 없는 지면에서 최소한으로 남은 삶의 존엄을 지킨다. 카우리스마키는 하늘과 해양과 지상을 오가며 고유한 영화적 여정을 변주하고 각각의 인물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 장소를 건넨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재회한 연인들은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인물들처럼 완전한 도피로 향하지 않고, 정해진 장소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낙엽이 날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안사는 버려진 개의 이름을 ‘채플린’으로 지었다고 말해준다. 버려진 개는 과거가 없기에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들은 찰리 채플린 영화의 연인들처럼 뒷모습으로 화면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채플린 영화의 떠돌이처럼 영원한 방랑에 돌입하지 않을 것이다. 반복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개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매개한다. ‘채플린’이라는 개는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책임으로 존재한다. 연인 사이에 놓인 떠돌이 개. 그것으로 그들은 결합하게 되고 주어진 삶의 형태를 지속할 것이다. 혹은 지속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한정 짓는 조건이 우리의 현실을 연장하는 필연적 근거로 거듭난다.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 장면에 카우리스마키가 응시하는 ‘현재’의 시간이 있다.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완료되지 않은 미래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그 특별한 시제가 솟아오른다. 이것이 우리의 자리, 영화의 시간이 속한 자리다. “영화는 간단하다. 계절이 지나고 남자와 여자는 재회한다. 그들 사이에 개가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속에, 다른 하나는 하나 속에. 그리고 그들은 셋이다.”(장 뤽 고다르, <언어와의 작별>에 관해 작성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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