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는 것
2024-01-17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씨네21>에 실린 기왕의 <서울의 봄> 평론들을 읽었는데 다들 대체로 박한 평가를 담았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좀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장병원, 안시환, 김예솔비 등 <서울의 봄>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논한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12·12 반란 세력의 봉기를 막지 못한 기성 권력의 실패를 남성성의 신화로 위무한다고 비판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공허한 권력의 실체

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만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그는 승리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끽하고 싶다(전두광 혼자 돌아가는 장면을 찍어둔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희와 고독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의 기운에 카메라가 동참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반란군 일행이 환호하는 사이에 화장실에서 오줌을 싸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소변을 본다라는 말 대신 ‘오줌을 싼다’라는 상스러운 말을 쓰는 것은 그의 행위가 그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오줌을 싸고 권력 찬탈에 매진했던 하룻밤의 소모적 기운을 다 빼내며 희희낙락한다. 표현의 경계가 허락했다면 김성수 감독은 남근을 클로즈업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세등등하고 무섭고 추한 남근. 전두광이 화장실에서 오줌을 의기양양하게 누고 있을 때 병행편집된 화면에는 체포된 정상호 참모총장(이성민)의 고문을 받아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보인다.

전두광이 반란군 일행에서 떨어져나와 화장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중반부에도 있었다. 반란의 서막이 울리고 시시각각 전황이 보고되는 긴장된 순간들을 견디며 전두광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세면대에 물을 받아 얼굴을 파묻고 식히며 결의를 다시 다진다. 화장실에 따라온 절친 노태건 소장(박해준)에게 전두광은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는 반란군 동료들은 떡고물을 바라는 것들이며 자신은 그들에게 기꺼이 떡고물을 주겠노라고 표효한다. 긴장하거나 긴장이 풀리면 오줌이 마렵다는 생리적 현상을 자연스럽게 묘사하면서 감독은 전두광의 광기 서린 권력욕과 그의 곁 무리의 맹종의 해우소로서의 화장실을 시각적 은유의 중심에 놓는다. 결말의 화장실 배설 장면은 반부 화장실 장면의 기운찬 메아리이며 화장실은 먹고 싸는 삶의 기본적인 순환을 극점으로 올려놓는, 잘 먹고 잘 싸는 권력에의 추종을 장식하는 장소이다.

전두광과 그의 휘하에 있는 장교들은 근엄한 권력을 스스로 장식하는 데 열심이지만 실체는 찌질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늘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자신들은 ‘하나’라는 자기최면과 세뇌에 취해 있지만 외부로부터 자그마한 균열의 조짐이 들어오면 허둥대기 바쁘다. 12월12일 그날의 반란 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모했고 여러 차례 위기를 맞는다. 상황이 절망적일 때 그들의 대응에는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노회한 장교들의 모습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12·12 반란 정변은 사전에 계획했으되 실행에 있어서는 허점투성이였고 지도자의 리더십과 상황대처 매뉴얼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국가적 재난의 희비극이었다. 이는 5·16 쿠데타와 비슷하다. 그 당시 내각제 수반이었던 장면 수상은 수녀원에 피신했고 이 리더십의 공백 속에 한강 다리를 넘으며 실패를 예감하고 자살을 결심했던 박정희는 상황의 반전을 일으키고 쿠데타 정부의 리더가 되었다. 12·12 반란 역시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참모총장, 혼란의 위기 속에 피신해버린 국방장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대통령의 리더십 공백이 빚은 또 한번의 군대 정변이었다.

전두광의 화장실 배뇨 장면과 함께 <서울의 봄>의 후반부에서 인상적인 것은 참모총장 체포안을 결재하지 않고 버티다 다음날 새벽 마지못해 결재하며 날짜와 시간을 명기함으로써 사후결재의 흔적을 남기는 대통령 최한규(정동환)의 행동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행동으로 인해 12·12 반란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오랜 관료 생활 끝에 어부지리로 잠시 최고 지도자가 되었던 대통령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보신주의 처신이다. 그는 전두광이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상관의 체포서류를 기안한 12월12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국방장관의 재가를 받아오라는 핑계를 대며 결재를 미루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절차를 밟을 걸 요구하는 원칙주의자의 가면 뒤에 숨어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직자의 보신주의는 행동하는 척하되 책임질 결정은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사후 문책을 당할 만한 빌미도 남기지 않는, 아무 의미 있는 업무 처리도 하지 않음으로써 무오류성을 입증하는 이곳 지도층의 무능을 증거하는 압축적인 표상이다.

최한규의 관료적 보신주의는 <서울의 봄>의 대다수 등장인물들에게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는 공통된 직업 매뉴얼이다. 스스로 행방불명이 된 국방장관을 비롯해 직속 상관이 체포되었는데도 중요한 계기 때마다 계속 결정을 미루는 참모차장(유성주)의 처신은 판단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무능한 보신주의의 전형이다.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 국방장관, 참모차장의 유능함을 가장함으로써 무능을 가리는 보신주의의 실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군의 지휘체계에 혼선을 일으키며 진압군측은 별다른 유의미한 조치를 취해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의 지휘체계에 있는 이들의 무능과 보신주의는 반란을 일으킨 전두광 소장측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보인다. 그들은 권력을 잡아야 일신의 영달을 꾀할 수 있다는 전두광의 선동에 혹하면서도 이익 공동체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순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망설이고 허둥대며 이탈할 조짐을 보인다(임상수의 <그때 그사람들>이 그랬듯이 김성수는 당시의 국가 시스템이 희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잡인들의 시스템이라고 본다). 전두광은 이들을 명분으로 이끄는 영웅적인 리더가 아니라 수시로 협박하고 회유하고 유혹하는 선동꾼이며 단독자로서의 결단이 아니라 너와 나는 한편이라는 가짜 최면의 귀재이다. 전두광은 늘 무리에 속해 있고 무리를 몰고 다니며 하나회 신입 회원을 받을 때도 자기 자리에 앉히고 어둠 속에서 사이비 교주처럼 너는 곧 나라고 유혹한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전두광 자택에서 거사를 모의할 때도 중요한 의사 결정의 순간에 그들은 정해진 의식처럼 방 안의 전등을 끈다. 그들은 고유의 개성으로 식별될 수 있는 개인들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피아를 잊고 동일자라는 최면을 거는 이익 결사체의 구성원들이다.

그럼에도 실패의 가치를 증명하며

김성수 감독은 12·12 반란이라는 역사적 재난을 다루면서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 등의 할리우드 고전영화 거장들이 추구했던 전문가주의와 존엄(dignity)의 테마를 자기식으로 변형한다. 12·12 사건의 격랑 속에서 반란군 편이나 진압군 편 어느 쪽에서도 전문가주의는 발휘되지 않았다. 매뉴얼은 무시되었으며 고로 매뉴얼 내에서의 최고의 실행력을 보여주는 집단이나 개인의 모습도 없었다. 그보다는 예기치 않은 상황 변화 속에서 최종 목표 달성을 위해 반칙과 협잡을 서슴지 않는 집단이 승리했다. 전두광은 그 야비한 무리의 리더로서 소심한 관료집단의 경계를 뛰어넘는 교활함과 대담함으로 자기 편의 승리를 챙겼다. 이는 전문가주의의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활력, 목표 지향적인 움직임,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돌파력 등을 시각적으로 웅변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안보를 책임지는 장군들이 전방에 있는 정예부대를 서울로 투입한다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리는 반국가적 행위가 유능함의 표식으로 증거되는 아이러니가 이 악인들의 소동극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제 정우성이 연기하는 이태신 소장을 얘기할 때가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된 이 허구적 캐릭터는, 장병원 평론가의 표현에 따르면 ‘숭고한 남성성의 현현(顯現)을 앙망하는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그는 전두광에 비하면 역사적 실재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새로 창조된 인물로서 “존재한 적이 없는 이 초인은 숭고한 남자의 덕목, 명예와 충성심, 사명, 직업윤리를 표상한다” . 나는 전두광 역시 김성수가 자기 눈으로 재해석했으며 제5공화국 내내 ‘위대한 영도자’로 신화화되었던 실존 인물 모델의 존재감을 스크린에서 탈신화화했고 그 과정에서 의리와 용기 따위로 수식되는 남성적 규범의 관습을 수컷들의 거짓 행동강령으로 처참하게 쓰레기통에 처박았다고 본다.

이태신이 역사적 현실에선 존재한 적 없는 이상적인 캐릭터의 낭만적인 재해석이라는 기왕의 평론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남성성의 현현(顯現)을 앙망하는 판타지를 지향하는가에는 의문이다. 정우성의 아름답고 꼿꼿한 육체의 현현이 이태신을 물리적 매혹의 중심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그는 서사의 활력을 추동하는 데 있어서 전두광에게 시종 밀린다. 이는 영화에서 그가 수차례 말하듯이 그가 ‘무능함’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광측의 반란에 비분강개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집단에 총 한방 제대로 쏘지 못했다. 극적으로 과장된 클라이맥스의 광화문 대치 장면에서도 외형적으로 수식된 화면의 비장함이 이태신의 무능과 절망을 구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부대가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이태신 소장은 부하들에게 자신의 무능을 사과하며 전두광쪽을 향해 겹겹이 쳐진 바리케이드를 넘어 홀로 전진한다. 그의 당당한 보무는 금방 흐트러지고 그는 권총마저 떨어트린 채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시종일관 산처럼 꼿꼿했던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중심을 놓치고 허물어지며 반란군 병사들에게 허무하게 체포당할 때 비극적 파토스가 발생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보인 무능의 참혹함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대신 정우성의 이태신이 끝까지 보존한 것은 그의 존엄이다. 그는 직업 군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진 않았다. 이는 정우성의 이태신과 실존 모델이었던 장태완 소장 모두 지켰던 가치다. <서울의 봄>은 역사적 사실을 들어 전문가주의가 통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관료적 부패를 극한으로 보여주며 비루한 인간들로 가득 찬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존엄한 인간들의 가치를 앙망하는 영화이다. 또한 이는 어쩔 수 없이 현실정치의 불운한 맥락을 상기시킨다. 이 영화는 1979년에 일어났던 비극적 사건의 재해석일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수년 전 검찰총장과 기획재정부 장관이 월권을 일삼을 때 절차적 정당성을 빌미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의 관료적 무능의 결과로 우범지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사무치게 상기시키는 메아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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