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질 때까지.” 활짝 폈을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소멸시키는 순간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벚꽃의 이미지는 일본 미의식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모노노아와레’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슬픔이 동반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그것이 <경성크리처>가 구현하려 한 영화의 주된 정서다(이러한 정서와 관련된 몇몇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차용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경성크리처>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가 그 아름다움이 슬픔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했다고 말하려 한다. 하지만 <경성크리처>가 추구하는 슬픔의 정서는 ‘크리처’를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에 대한 관람자의 기대에서 크게 어긋난다. 관람자는 괴물의 힘으로 미칠 듯이 질주하는 속도감의 작품을 기대했겠지만, 슬픔의 정서를 추구하는 경향은 이 질주의 속도를 한없이 늦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감독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크리처를 중심으로 한 재난의 서사였을까, 아니면 비극의 시대에 내던져진 청춘들의 이야기였을까? 무엇이 이 작품의 시작이고 목적인지 단언할 수 없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두 요소가 작품 안에 하나로 용해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괴물과 정서의 부조화
감탄한 표정의 일본인 장교는 자신의 피조물을 여신이라 칭하지만, 이 괴물에게서 특별한 매력이나 압도적인 위협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한 장면을 제외하면 말이다. 괴물/어머니가 온 힘을 다해 (바짝 말라 앙상해진 나뭇가지처럼 묘사된) 촉수를 뻗어 채옥(한소희)을 감싸 지켜주는 장면은 압도적이지만(괴물과 슬픔의 정서가 제대로 겹쳐진 유일한 장면이다), 아쉽게도 이 장면에서 보여준 괴물의 매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경성크리처>는 최근 한국 크리처 영화의 여러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을 준다. <부산행>에서 시작해 <킹덤> <스위트홈>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 등의 크리처 작품들은 대체로 공간에 방점을 두곤 한다. 그 정수는 봉준호의 <괴물>이다. <괴물>은 실패한 삶에 좌절해 한강에 투신하는 한 중년 남성을 영화 초반부에 배치한다. 괴물은 그 시체를, 그러니까 세상 끝까지 내몰려 자신의 몸을 한강에 내던진 자들의 좌절을 먹고 자랐다. <괴물>에서 한강이 단순한 강이 아닌 것처럼, <부산행>의 기차, <지우학>의 학교 등은 한국 사회의 특정한 모순이 집약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물론 사회적 문제의식을 장르적으로 녹여내는 방식은 크리처 장르뿐만 아니라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K무비, 또는 K드라마의 특성이기도 하다(<오징어 게임> <D.P.> <소년심판> 등). <경성크리처>는 실종된 명자와 최성심을 찾는 것으로 본격적인 서사의 시작을 알리는데, 실종자들이 모인 곳이 옹성병원이다. 괴물은 그곳에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실종자들, 그렇게 옹성병원은 식민지 조선을 표상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 크리처 장르의 특징이긴 하지만, <경성크리처>는 제한된 공간을 감금의 공간으로 오용한다. 괴물이 실제 갇혀 있기도 하지만, 괴물의 활동성 자체도 제한적으로 작동할 뿐이다(특히 초중반부). 크리처 영화에서 괴물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극에 긴장을 불어넣어야 한다. 괴물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을 때도 그 긴장감이 지속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위트홈> 시즌1은 제한된 공간이 극적 긴장감을 일으키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누구도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생존자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든,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든 팽팽한 긴장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우학> 역시 때로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의 말장난과 다툼이 있긴 해도 언제 어디서든 뛰쳐나올 수 있는 괴물로 인해 긴장감이 지속된다. 그 강도의 높낮이만 조절될 뿐이다. <경성크리처>는 태상(박서준)과 채옥의 관계가 발전할수록, 그리고 옹성병원 바깥으로 카메라의 시선이 벗어날 때마다 극적 긴장감이 너무나 맥없이 풀려버린다. 동일하게 신파적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부산행> <지우학> 그리고 <스위트홈>과 달리, <경성크리처>의 신파성은 유독 두드러진 결점처럼 보인다. 아름답게 피는 순간 이내 져버리는 벚꽃 같은 사랑을 묘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만, 괴물의 긴장감이 받쳐주지 못하는 사랑의 몸짓과 언어들은 그저 신파적일 뿐이다. 또한 목걸이에 얽힌 짧은 플레시백 하나만으로 채옥 가족의 비극적 사연에 공감하라는 것 역시 무리수에 가깝다. 60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가지면서도 그렇게도 중요하게 작동하는 이들의 사연을 차곡차곡 쌓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슬픔의 정서는 크리처 장르와 반복적으로 부딪히며 삐걱댄다.
<경성크리처>의 괴물은 기계적으로 작동할 뿐, 정서적으로 제대로 극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경성크리처>에서 작가와 감독의 크리처 장르(또는 공포나 스릴러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과 달리, OTT 플랫폼 시대의 괴물의 역할만큼은 정확하게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다.
괴물, 시간의 포식자
<경성크리처>가 제대로 준수하는 서사적 원칙 하나는 관람자가 다음 회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각 회의 엔딩 부분에서 괴물을 후크로 활용하는 일이다. <경성크리처>의 각 회 엔딩은 대체로 괴물로 인해 다음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고하며 끝맺는다. OTT 플랫폼 시대의 괴물은 시간의 틈을 삭제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OTT 플랫폼 시대의 스트리밍 관람자들에게는 시간적 틈이 허용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다음 회 버튼이 클릭되어야 한다. 마치 크리처 장르에서 소화의 과정이 불필요한 포식자 괴물처럼, 지금 자신이 본 것을 곱씹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다음 회를 먹어치우기 위해 달려들도록 유도하는 것이 지금의 OTT 플랫폼이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수고로움과 어떤 작품을 볼 것인가 숙고하는 시간, 또는 다음날 이어질 다음 회를 기다리던 시간적 틈은 ‘다음 회’ 버튼 앞에서 사라진다. 한가로운 뇌와 혹사당하는 눈.
관람자의 체류 시간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여기는 OTT 플랫폼 입장에서도 한번만 꼬시면 600분에 가까운 관람자의 시간을 먹어 치울 수 있으니 영화보다 드라마에 열을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넷플릭스 등의 글로벌 OTT 플랫폼이 한국 드라마 중에서도 특히 크리처 장르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까닭은, 이러한 유형의 작품이 글로벌 시장으로 퍼져나갈 때 원초적 공포감을 생명으로 하는 괴물만큼 지역에 따른 ‘문화적 할인’이 적은 소재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괴물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은 말 그대로 본능적이고 말초적이니 말이다. ‘K’라는 수식어는 한국에서 제작됐다든가 아니면 한국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이러한 면에서 문화적 할인이 없는 괴물은 그 자체로 글로벌적이다. K드라마라는 미명하에 이어지는 괴물의 시대. 진짜 괴물은 당신의 손가락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